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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독립운동 자금 모금으로 옥살이 한 기산도, 장흥 객창에서 외로이 숨지다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19회 독립운동 자금 모금으로 옥살이 한 기산도, 장흥 객창에서 외로이 숨지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옥에서 풀려난 기산도는 곧바로 광주로 내려갔다. 종조부인 의병장 기삼연이 순국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산도는 어려서부터 기삼연의 총애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 역시 기삼연을 존경하고 따랐다. 일설에 따르면, 기산도가 매국오적을 암살하기에 앞서 종조부 기삼연의 지도가 있었다고 한다.

기산도가 옥에서 풀려난 것은 <<폭도편책>>에 실린 광주경찰서장 반도에이지로(坂東榮次郞)의 보고로 미루어 볼 때, 2월 중순 경으로 짐작된다. 기산도가 이근택에 대한 살인미수로 체포되어 옥에 갇힌 것이 1906년 2월이고 2년 반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니 만기보다 6개월 먼저 출소한 셈이 된다. 반도에이지로의 보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월(2월) 17일자로 장성주재 순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었다. 즉, 당군(장성군) 서삼면 송계리에 거주하는 기모는 그의 아들 기산도와 같이 기삼연의 사체를 장사지내고, 또 기삼연의 뒤를 계승하여 거사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시기상조라 지금은 삼가고 있으나 기산도는 목하 준비 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당소는 곧 밀정을 파견하여 그의 거처와 사실의 진상을 정탐 중이다.”주1)

주1) 원문은 기산도를 奇三度로 그의 부를 奇益否로 오기해 놓고 있다.

이 내용은 기광도의 <성재공행록>에 실린 내용과도 상통한다. 기광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기산도가 내려와 광주경찰서와 교섭하여 종조부의 유해를 옮기려 했는데, 이들이 허락하지 않아 서탑동에 임시 매장하였다. 이 때 왜정이 그에게 “당신이 기삼연의 일을 계승하였느냐”고 물었다는 것이다.주2)

주2) 반면에, 오준선의 <의병장 기삼연전>에는 광주 선비 안규용(安圭容)이 관을 갖추고 유해를 수습하여 서탑등에 모시고 제문을 지어 올렸다고 적고 있다. 두 글을 종합하건대, 아마 먼저 안규용이 기삼연의 시신을 수습한 뒤 곧 바로 기산도가 내려온 것으로 판단된다.

아무튼 기산도가 고향으로 내려와 일시적이나마 의병투쟁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폭도편책>>에 수록된 또 다른 보고(영산포헌병분대 학교분견소의 보고)에 의하면, “항상 소집단을 이루고 관내를 배회하던 ‘적괴 이대국’과 기삼도 등이 점차 관내를 벗어나 일진회원 및 함평군수에게 격문을 보내는 등 재차 함평읍내를 습격할 계획을 갖고 영광 및 장성 방면 산중에 잠복한 것 같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기산도가 의병대열에 오랫동안 합류했던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발견된 여러 자료에 근거해 볼 때 기산도는 안중근 의거 이전에 이미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안중근과 왕래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 측의 정보 보고서는 기산도와 함께 정순만, 이범석, 이상설 등의 이름도 거명하면서, 이들이 이미 1908,9년에 연해주 일대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909년 12월 경 일제가 작성한 또 다른 내용의 보고서를 통해 볼 때 기산도는 안중근 의거 직후 얼마 안 되어 연해주에서 귀국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을 떠나 방랑 끝에 고흥군 도화면 당곤리(堂昆里)에 이르렀다. 고흥 당곤리에는 같은 성씨인 기하요(奇夏堯)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그 집에 몸을 숨겼다. 낮에는 여느 머슴과 같이 들에 나가 일을 하는 머슴살이를 하면서 밤에는 사랑에 서재를 차리고 젊은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러다 1919년 고종 황제의 승하 소식을 듣고 국장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 기산도는 마침내 삼일운동을 목도하면서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지도했으며, 이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후원자를 팔방으로 수소문하여 비밀자금을 모집 송금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기산도는 서울에 머무는 동안 임시정부의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군자금을 모금하고 있던 김철(金澈)을 만났다. 김철의 본명은 김연상(金演相)으로 경기도 장단군 장남면 원당리 출신이었다. 기산도는 김철로부터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된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에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자를 파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철은 자신은 임시정부의 명을 띠고 조선 각지에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또한 ‘의무금’을 모집하러 왔다면서 기산도에게 동참알 것을 요구하였다. 기산도는 김철의 취지에 찬동하고 김철로부터 ‘전라남북도 의무금 요구 특파위원’에 임명되어 사령장을 받았다.

기산도는 1919년 5월 김철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에 있는 부친 기재의 집에 데리고 가 인근의 동지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기산도는 5월 24일경 김철과 함께 영광군 백수면 장산리의 김종택(金鍾澤)을 찾아가 임시정부의 조직을 위한 국민대회 취지서와 선포문 등을 보여주면서 동참을 권유하였다. 김종택은 이에 응락하고 이인행(李仁行)을 기산도에게 데리고 와 동참하게 하였다.

6월 상순경 기산도는 장성군 황룡면 장산리의 박균상(朴均庠)의 집에서 박은용(朴殷容)을 만나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 활동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여 약속을 받았다. 박은용은 1907년 기삼연 의병진에 종군한 의병 출신으로 1907년 파리장서에 서명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기산도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은 이후 7월 말경까지 계속되었다. 기산도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참여시킨 인물 가운데는 김종택, 이인행, 박은용 외에도 유생으로 1907년 이후 광양에서 의병투쟁을 한 황병학(黃炳學)도 있었다. 이들은 전라남북도 일대에서 적극적인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이에 호응한 사람들 가운데는 자신의 소를 팔아 자금을 마련하여 제공한 장성군 황룡면 월평리의 김요선(金堯璿)과 같은 이도 있었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7월 하순경까지 기산도 등에게 군자금을 제공한 인물로는 순천군 조면식, 곡성군 김창규·안창선·이화영·이선근·조용준, 구례군 김형석, 보성군 최재학, 임실군 김학수, 남원군 윤용섭, 고창군 강대식 등이 있었으며, 이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 총액은 504원이었다.

기산도는 8월 초순경 모금활동이 노출됨에 따라 모금액을 분배하고 모금활동을 중단하였다. 기산도는 그동안 모금한 군자금을 나누어 자신은 백원, 황병학 3백원, 박은용 260원, 이인행과 김종탁은 각각 20원씩 맡기로 하고 각자 흩어졌다.

그러나 1919년 10월 김종택이 동료들과 서울의 부호 홍종욱(洪鍾旭)주3)의 집에서 370원의 적금통장을 강탈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관련자를 체포하여 조사하는 과정에서 기산도의 행적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산도와 이인행은 장성군 황룡면 관지리에서, 김종택은 영광군 백수면에서 10월 21일 전라남도 경찰에 의해 각각 체포되었다. 임시정부로부터 파견되어 기산도와 접촉했던 김철은 이미 상해로 돌아간 뒤여서 체포를 면했다.

주3)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2009)에 의하면, 홍종욱은 1910년 10월 경상남도 하동군 서기에 임명된 뒤, 1911년 8월 고등관 8등의 군수로 승진해 합천군수로 부임했고, 1912년 3월 경상남도 울도군수로 옮겼으며, 그해 8월 정8위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은 인물이다. 그는 이후 함경남도 북청군수, 함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기산도는 1920년 5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결정을 받고, 7월 19일 판결을 받았다. 기산도는 황병학·박은용과 함께 징역 3년형을, 이인행은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종택은 예심종결결정을 받고 공판에 회부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자택에서 요양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그런데 1977년 7월 12일 전남일보 김동영 기자가 쓴 <의병열전 –의사 기산도->에 의하면, 기산도는 체포되기 직전인 1919년 10월 중국의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키 위해 제자인 박길용(朴吉用)과 기동연(奇東衍)을 데리고 평안도 진남포까지 갔다고 한다. 이때 진남포에서 동지들과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기다리며 기산도는 제자 박길용에게 이별사(離別詞)를 써주었는데, 그러나 박길용은 혼자서는 도저히 고흥에 돌아가지 못하겠다고 버티었다고 한다. 일본헌병의 고문으로 오른쪽 다리를 저는 스승을 이국땅으로 보낼 수 없다는 눈물어린 호소에 결국 기산도는 제자 박길용의 만류로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는 것이다. 만일 망명에 성공했다면 이후 체포를 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전라남도 경찰에 의해 체포된 기산도는 광주로 이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가 얼마나 가혹한 고문을 당했는가는 매질에 의한 상처로 짓무른 그의 정강이에 구더기가 우글거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기산도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혀를 깨물어 버렸다.

형기를 마친 기산도는 다시 출옥했으나 이제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는 한쪽 다리를 완전히 저는 불구자가 되었다. 나라를 뺏긴 그는 고향을 두고도 찾지 않고 방랑하다가 1928년 12월 4일 장흥의 차디찬 객창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1세.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떠도는 걸인선비’로 자칭하여 “유리면걸지사 기산도지묘(遊離丏乞之士 奇山度之墓)”란 나무비 하나만을 세워 달라는 유언을 남기었다.

그의 시체는 장흥에 묻혔다가 뒷날 그의 양자 노식(老植)에 의해 고흥에 옮겨졌다. 1963년 정부는 기산도의 공적을 기려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에 따라 고흥에 있던 그의 유해는 1967년 국립묘지 애국선열묘역에 이장되었다.

참고문헌

<<폭도에 관한 편책>> 융희 2년 2월 19일 기사 외.
1920년 7월 19일 광주지방법원 <판결> 외.
김동영, <의병열전, 의사 기산도>, <<전남일보>> 1977년 7월 12일자.
김상기, <기산도의 항일의열투쟁>,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4, 2006.
기타 <<동아일보>>, <<매일신보>>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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