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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의병투쟁의 확산과 일본군의 대응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15회 의병투쟁의 확산과 일본군의 대응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겨울에 접어들면서 기삼연은 광고문(격문)을 써 각 고을에 띄웠다.

<호남창의대장이 널리 각 고을에 고함>

이웃나라와 외교한다고 핑계하고 통상에 대한 방책이 없었던 것이 실로 화단이 되었다. 처음에는 음란하고 부정한 물건을 만들어서 우리 민속을 문란케 하고 마침내는 매국하는 무리에게 뇌물로 매수하여 백성과 사직에까지 가만히 옮기니 화의 근본이 끊어지질 않는다.

본 의소는 큰 일을 일으켜서 강토(국권)를 회복하기를 맹세하였으나, 병을 얻은 근원을 살펴서 명현(瞑眩 병이 치유될 때 일어나는 현기증 현상)이 일어날 정도의 약을 쓰지 않으면 한갓 군사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이에 화의 근본과 병의 근원 몇 가지를 대략 들어서 본 의소가 정한 일도양단의 방침을 통절히 보이노니, 각기 마음을 씻어 영을 따르라. 그렇지 않은 자에게 본 의소는 장차 형벌의 절차 없이 즉시 살육하여 후환 없는 법을 시행하겠노라.

1. 곡식의 매매에 제한과 방지가 없음은 실로 우리 백성의 목숨을 여위게 하고 가만히 우리 국가의 명맥을 해치는 것이다. 소민들은 무지하여 작은 이익을 엿보고 큰 해독을 잊어버리니 그들에게야 논할 것이 있으랴. 간악하고 교활한 상인들이 실로 창귀 노릇을 하는 것이니 이 종류를 베이지 아니하면 나라가 장차 빈터가 될 것이다. 마땅히 처자까지 벌을 주리라.

1. 부정하고 교묘한 물건은 실로 순박한 풍속을 깨뜨리는 것이다. 감히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그 물건을 불태우고 그들도 죽이리라.

1. 왜노와 가만히 통하여 우리의 기밀을 누설시키는 자는 용서치 않고 죽이리라.

위 세 가지는 그 중 심한 것만 들은 것이다. 이후 게시하여 널리 고하고 한 결 같이 삼가하고 두려워할지라.

정미 10월 24일(양력 11월 29일)

위 광고문에서 세 번째로 지적한 왜노의 앞잡이 중 기삼연 등이 가장 큰 병폐로 꼽은 것은 당시 통감부가 새로 임명한 세무 관리인 세무주사와 공전영수원(세금징수원), 일제가 의병 활동의 방해와 밀고를 목적으로 각 고을에 조직한 자위단원, 친일매국노 송병준 등이 조직하여 만든 일진회원 등이었다.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이 기삼연 등은 이른바 ‘토왜(土倭)‘로 지칭되는 이들을 국권 상실의 근본 원인으로 인식하고, 일인이나 일본군경 관리 못지않게 의병부대의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실제로 기삼연 등이 마을에 나타나 배일격문을 돌리고, 심지어 일인과 관리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던 사실이 일제의 정보 보고서에도 등장하고 있다.

1907년 12월 한 겨울의 추위가 계속되자 이를 견디지 못하고 대열을 이탈하는 의병들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되자 기삼연은 동짓날에 장성의 수연산에 모여 장성과 영광읍을 공략할 계획을 세운 다음, 각 예하부대에 전령을 내려 그 사이 의병들이 충분히 쉴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휴식을 마친 기삼연은 1907년 12월 22일 부대를 이끌고 영광을 공략키 위해 행군을 시작하였다. 도중에 그들은 황량면(黃良面) 산삼리(山三里 현 묘량면 삼학리) 주막에서 저녁을 먹고 있던 일인 순사 한 명과 마주쳤다. 그는 영광분파소 후꾸다(福田) 순사로 저 나름대로의 일을 보고 귀임하다가 의병부대를 조우한 것이다.

<전남폭도사>에 의하면, 당시 기삼연의 부하는 50여 명이었으며, 쌍방 교전 중 가옥이 불에 탔다고 한다. 후꾸다는 이 틈을 이용해 주막에서 빠져나와 마을에 들러 주민의 옷을 빼앗아 변복하고 영광으로 도주하였다. 얼마 후 영광수비대 하세가와(長谷川) 소위 이하 11명과 분견소순사가 후꾸다 순사를 앞세워 기삼연 의병부대에 반격을 가해왔다. 어둠 속에서 쌍방은 얼마간 교전 후 별다른 피해 없이 흩어졌던 것으로 보인다.주1)

주1)일본군 보병 14연대의 <진중일지>에는 이 날 밤 하세가와 등이 현지에 도착하기 전 먼저 적의 사격을 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기삼연이 이들의 반격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의병대는 교전 얼마 후 어둠을 이용하여 퇴각함으로써 큰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일이 있은 후 1월 3일에는 김준의 동생 김율이 부하 1백여 명을 이끌고 함평주재소를 기습하였다. 이 때 순사 2명, 우편취급소장 및 재류일본인 2명이 응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이들은 무안군 학교(鶴橋 현 함평군 학다리)로 달아났다. 곧 이어 순사와 헌병으로 구성된 ‘토벌대’가 추격해와 양측이 나산(羅山)에서 회전했으나 김율은 끝내 종적을 감추었다.

1908년 새해(음력 12월)에 접어들어 기삼연과 선봉장 김준, 그리고 김준의 동생 김율 등이 이끄는 호남지역 의병대들은 유격전을 전개하며 한층 더 반일투쟁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그러한 가운데 1월 중순 광주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1월 13일 ‘폭도’ 약 50명이 광주군 국지면(局池面) 사쿠마(左久間) 농장을 습격하여 일본인 2명을 죽이고 1명을 부상케 하였으며, 2명은 행방불명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어느 의병부대의 소행인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기삼연 의병부대가 아니면 그와 연계된 회맹소의 일원이 저지른 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월 22일에는 기삼연, 김준, 김율의 연합부대 4백여 명이 또다시 함평 주재소를 기습, 일병과 경찰을 상대로 8시간에 걸친 총격전을 벌였다. 이 때 당시 격전 상황을 <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1월 22일, 거괴 기삼연, 김태원(金太元 金泰元의 오기), 김율의 연합집단 4백여 명은 다시 함평주재소를 습격했다. 순사 3, 헌병 1명이 즉시 응전하였는데 하다노(波多野) 순사가 전사하고 탄약마저 떨어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목포분견소장 이하 10여 명이 응원해 와서 교전 8시간 만에 이를 격퇴했다.

이처럼 의병부대와 일병간의 전투가 격화되는 가운데, 1월 24일 광주군 천곡면(泉谷面)에 사는 일진회원 오경윤(吳京允)이 비아(飛鴉)시장에서 의병들에 의해 총살당하였고, 일진회원 김민홍(金敏洪)의 집이 불태워졌다. 이처럼 각지에서 의병들의 반일투쟁이 격화되고, 일본인과 친일세력의 피해가 늘어나자, 담양과 같은 곳에서는 사의(辭意)를 표하는 관리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일제측은 1월 25일 광주수비대장 요시다(吉田)소좌를 대장으로 하는 ‘토벌대’를 편성하여 함평, 장성, 나주 일원에서 활동하는 의병세력의 진압과 수색에 나섰다. 요시다 토벌대에는 특별히 광주경찰서의 순사까지 배속시켰다.

물론 이번 ‘토벌작전’의 핵심 목표는 1907년 가을 이후 호남지역에서 의병투쟁을 활발히 전개하며 이를 호남 전역 확산시키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의병대장 기삼연을 체포하는 것이었다. 작전 개시 후 수일동안 이들이 벌인 ‘토벌’의 주요 성과를 <전남폭도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 장성 방면의 이마무라(今村) 종대(縱隊)는 1월 25일 밤 11시 장성군 약수정 박흥리(朴興里 현 북하면 약수리) 백양산에서 의병 10명을 죽이고 4명을 포로로 했으며, 화승총 13, 양총 2, 군도(軍刀) 1을 노획하였다.

(2) 요시다와 고오찌(河內)의 두 종대는 1월 26일 오후 4시 장성군 비치(非峙 현 서삼면 모암리 소재) 마을 부근에서 3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공격하여 40분간 교전 끝에 32명을 죽이고 화승총 18과 기타 잡품을 노획하였다.

(3) 요시다 토벌대는 1월 28일 함평군 불갑산(현 영광군 소재)에서 의병 60명과 충돌하여 5명을 죽이고 화승총 2정을 노획하였다.주2)

주2) 이 외에도 <진중일지>>에 한 차례의 전투가 더 보고되어 있다. “25일 오전 3시 내정리에 도착하니, 적은 이미 사창(社倉 영광 동방 약 4리) 방향으로 떠났음을 정탐하여 알고 이들을 추섭하여 오전 11시 40분 사창 남방 약 천5백미돌에 도달하였다. 그 때 약 80의 적도는 동지 동방 및 서북방의 양 고지에서 진지를 점령하고(동방 고지에 약 30명, 서북방 고지에 약 50명) 척후를 향해 사격을 개시함으로써 2명을 동방 고지의 적을 향하게 하고, 나머지는 서북방 고지의 적을 향해서 응전하여, 약 1시간 30분 만에 드디어 동북방 장성 방향으로 궤주시켰다. 때는 25일 오후 1시 20분. 적의 사망 9, 부상자 10을 내려가지 않는다. 포로 4. 아에 손해 없다. 소모한 탄알은 162발이다.

한편, 영광을 공격하려다 물러난 기삼연은 또 다시 수연산으로 돌아와 다음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 때 기삼연은 추운 날씨에 무리한 행군을 하여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퉁퉁 부었다. 주위의 권고로 치료를 위해 약간의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기삼연은 장성 서우산(犀牛山)으로 들어갔다.

이즈음 기삼연이 많은 의병부대를 이끌면서도 군량미와 의복에 곤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광주관찰부의 관리 최상진(崔相鎭)과 담양의 관리 정상완이 사람을 보내왔다. 군자금 수만 량을 협조하겠으니 음력 12월 그믐 광주와 담양을 치고 무기고를 탈취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관찰사 신응희(申應熙)가 최와 정을 내장원에 공무 출장을 보내어 거사는 성사되지 못하였다고 한다.주3)

주3) 김동수, <의병열전>(광주일보 1977년 1월 22일자)

참고문헌
- 전남폭도사
- 일본군 보병제14연대 진중일지
- 성재선생거의록 약초(권2) 등
- <의병열전>(전남일보 1977년 1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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