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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895년 의병 봉기의 전야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5회 1895년 의병 봉기의 전야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노사 기정진이 세상을 떠난 3년 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면서 조선 사회는 더욱 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었다.

임오군란은 당시 왕비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한 민씨 일파가 군제 개혁의 일환으로 창설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우대하면서도 구식 군인들을 차별한 데서 비롯되었다. 임금 지불을 미루고 썩은 쌀과 모래 섞인 쌀을 봉급으로 지급하자, 부당한 대우와 차별에 분노한 무위영 소속 옛 훈련도감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였으나, 궁중을 탈출, 피신하고 있던 민씨 일파는 청의 군대를 불러들여 한 달여 만에 사태를 역전시켰다. 반란 세력에 힘입어 일시적으로 권좌에 올랐던 대원군은 결국 청에 인질로 잡혀가는 치욕을 겪어야 했다.

임오군란으로 원세개가 이끈 청의 군대가 서울에 주둔하게 되면서 친청세력의 권력 독점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김옥균 등은 조정 내 급진적 개화 인사들로 세력을 규합하여 일본의 명치유신을 모델로 한 근대개혁을 도모하였다. 개화정책을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키며 대립하던 민씨 일파와 김옥균 등 개화파 간의 권력투쟁은 1884년에 이르러 점차 정점으로 치달았다.

마침 청이 월남(베트남)의 종주권을 둘러싸고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는 틈을 타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등 청년 관료들이 정변을 꾀하였다. 1884년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우정국 낙성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킨 이들은 민태호 등 민씨 척족세력을 처단하고 일거에 권력을 장악하였다.

10월 19일 개화파는 정치개혁 요강을 담은 14개조의 정강을 공포하고 개혁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변을 돕겠다고 약속한 일본 측의 배신으로 개화파의 개혁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왕비와 결탁한 수구파 세력이 불러들인 청국 군대에 의해 개화파 정권은 삼일천하로 무너지고 말았다.

갑신정변 이후 청의 입김은 더욱 세어지고 개화정책은 후퇴하였다. 민씨 일파의 탐학과 부패는 한층 더 심해졌다. 이러한 민씨 세도정권 하에서 재정은 더욱 허약해졌고, 매관매직으로 벼슬자리에 오른 관리들의 탐학과 부패로 인하여 농민들의 살림살이는 더욱 어려워졌다. 그나마 대원군 집권기 추진된 내정개혁의 결과 다소 개선되었던 국가 재정도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1862년 이른바 ‘임술민란’ 이후 일시 진정 기미가 보이던 농민봉기(민란)도 점차 빈발해져 갔다. 개항 이후 1894년 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은 연대기를 비롯하여 여러 자료에서 발견되는 것을 모두 합하면 100여 건에 이르며, 농민전쟁 직전인 1893년 한 해에만 최소 66건의 ‘민란’이 발생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봉건정부와 관리들의 탐학도 심각하였지만, 1876년 개항 이후 전개된 근대 무역의 결과 농민을 비롯한 서민들의 경제는 더욱 어려워졌다. 일본으로 곡물이 과잉 유출되어 국내 곡물 가격이 등귀하였고, 값싼 외국산 면제품의 유입으로 국산 면포를 생산하던 농민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갑오동학농민운동)은 그 해 1월 10일 고부 농민봉기가 발단이 되었다. 만석보의 물세를 강탈하는 등 온갖 비리를 저지른 고부 군수 조병갑의 탐학을 참지 못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정부는 서둘러 조병갑을 처벌하고 사태 수습을 위해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주모자 색출을 명분으로 ‘민란’에 참여한 농민들을 마구 학살하였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 다시 투쟁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3월 20일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들은 전북 무장에서 농민전쟁의 기치를 올렸다. 백산에서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 전투에서 전라감영군을 격파하여 대승한 이후 그 여세를 몰아 호남 전역을 장악하고 4월 27일 마침내 호남의 수도인 전주성을 함락시켰다.

사태가 급박해지자 정부는 한편으로 경군을 파견하여 농민군과 협상을 추진하고(전주화약), 다른 한편으로는 청에 군대의 출병을 요청하였다. 정부의 요청에 따라 청이 아산만에 3천여 명의 군대를 상륙시키자,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일본도 6천여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경인지역 일대를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6월 21일 경복궁을 침입하여 민씨 척족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이어서 일본군이 아산만 앞 바다의 청의 함대를 습격한 것을 계기로 6월 29일(양력 8월 1일) 청일전쟁이 발발하였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의 개화파로 구성된 초기 개화파 정권은 농민군들의 개혁 요구를 일부 받아들여 다소나마 자주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뒤 본격적인 내정간섭을 시작하면서 개혁은 일본 세력의 부식과 침탈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비 세력은 은밀히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몰아낼 기회를 엿보았다. 이에 일본은 조선 지배의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여 그녀를 살해할 음모를 꾸몄다.

1895년 10월 8일(이하 양력)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梧樓)의 지휘 하에 일본군 수비대를 주요 무력으로 한 일본군 장교, 영사경찰, 신문기자, 대륙낭인 등 일본인들로 구성된 일단의 무리들이 경복궁을 기습, 왕비를 시해하였다. 이들은 건천궁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그 시신을 궁 안의 우물에 던졌다가 왕궁 밖 솔밭으로 다시 끌어내어 장작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사변’, 즉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다.

일본은 사건의 진상을 숨기려 했으나, 마침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인 전기기사 사바친과 미국인 시위대 교관 제너럴 다이가 이 사건을 증언하였다. 사건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국내 여론이 들끓고 유생들 사이에 의병 봉기에 관한 논의가 오가기 시작하였다.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선 인물은 충청도 보은의 유생 문석봉이었다. 그러나 아직 의병의 봉화가 본격적으로 타오른 것은 아니었다.

왕비 시해사건으로 민심이 들끓고, 민중들의 반일감정이 날로 높아가는 가운데, 김홍집을 위시한 친일내각은 개혁정책의 시행을 위한 빌미로 11월 15일 단발령을 공포하였다. 또 유길준, 정병하 등 개화파 대신의 강압에 떠밀려 억지로 머리를 깍은 고종은 1896년 1월에는 단발을 장려하는 조칙을 내렸다.

당시 개화파 정부로서는 국왕을 앞세워 본보기를 보이고, 이를 ‘구습’을 개혁하기 위한 지렛대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반 민중의 눈으로 볼 때 단발은 ‘일본인화 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유생들에게 단발은 문명을 버리고 야만을 택하는 행위로 인식되었고, 조국의 멸망과 도(道)의 소멸을 의미하였다.

단발령이 내려지자 왕비시해로 야기된 민중들의 반일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사방에서 의병들이 궐기하기 시작하였다. 의병들을 모으고 창의(倡義)에 앞장선 것은 지방 유생들이었다. 이 때 일본 수비대 뿐만 아니라 내정개혁을 빌미로 단발령을 단행한 개화파 세력과 친일 관료들이 모두 의병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다. 당시 유생들에게 왕비시해와 단발령은 조선의 자주권과 정체성을 부정하는 침략적 만행인 동시에, 선왕의 제도와 질서에 대한 용납될 수 없는 도전이기도 하였다.

의병들은 초기에는 자못 기세를 올렸으나 그다지 오래 지속되는 못하였다. 의병들의 항전의지가 약하고 오래 지속되지 못했던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 수 있다.

첫째, 전투에 참여할 병사의 구성에 문제가 있었다. 당시 의병부대의 지도부는 양반이나 유생들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병사의 대다수는 포군과 소작농민들이었다. 심지어는 유생군이 별도로 구성되기도 했으나, 대관광수(大冠廣袖 큰 갓과 소매 넓은 옷)로 정장한 이들을 실제 병사로 보기 어려웠다. 실제 전투 성원인 포군과 소작농민은 대체로 동원된 성격이 강하여 자발성이 부족하였다.

둘째, 의병진 내부에서 신분적 갈등이 야기되어 의병 스스로 전력을 약화시켰다. 지도층인 양반·유생과 병사인 농민층은 일제의 주권 침탈에 저항한다는 점에서는 지향점이 같았으나, 정치 및 사회제도의 개혁에 대해서는 서로 입장이나 이념이 달랐다. 유인석 부대에서는 포군 지도자와 양반 간의 지휘권 갈등이 심각하였으며, 심지어는 동학농민군으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했던 세력을 탄압하는 의병부대도 있었다.

이처럼 왕비시해와 단발령으로 촉발된 초기 의병운동은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반침략운동이면서도 개화파가 주도한 근대개혁에 반대하는 반개화운동이기도 하였다.

이를 주도한 척사파 유생들이 지키려 했던 것은 성리학의 이념이 구현된 신분제 사회였다. 그들은 당시 조선사회의 위기를 민족적 위기인 동시에 전통적 질서(구체제)의 위기로 인식하였다. 즉, 그들이 일으킨 의병운동은 앞서 노사와 그의 제자들이 벌리었던 ‘척사운동’의 연장이자, ‘척사이념’의 발현이었던 셈이다.

1895년 말에 일어난 의병운동은 1896년 여름경에 이르러 거의 막을 내렸다. 의병들의 투쟁은 그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춘천과 제천을 중심으로 강원·충북·경북의 3도 접경지역에서 활발하였다. 이밖에 강릉, 안동, 진주, 장성, 홍주 등지에서 척사파 유생들을 중심으로 의병투쟁이 전개되었다. 지도적 인물로는 제천의 유인석을 필두로 하여, 여주의 이춘영, 이천의 김하락, 안동의 권세연, 춘천의 이소응, 진주의 노응규, 문경의 이강년, 선산의 허위, 홍주의 김복한과 이설, 강릉의 민용호 등이 있었다. 그리고 호남에서는 장성의 송사 기우만이 노사 문인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거의(擧義)하였다.

■ 참고문헌

- 홍순권, 을미의병운동을 재평가한다, 역사비평 29호, 1995
- 김양식, 근대한국의 사회변동과 농민전쟁, 신서원, 1996
-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국학자료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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