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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호남과 서부 경남에 뿌리 내린 노사학파의 인맥과 활동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4회 호남과 서부 경남에 뿌리 내린 노사학파의 인맥과 활동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기에 관한 노사의 독특한 해석체계인 유리철학의 성립 배경으로는 그에게 특별한 사승 관계가 없었던 점도 한 요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노사의 가학적 전통은 16세기 호남 사림 형성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기대승으로부터 비롯된다.

다만, 17세기 이후 호남 성리학계는 이전 시기에 비해 학문적 영향력이 감소하는 등 주변부화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17·8세기 호남학계는 율곡의 학문적 영향 아래서 주로 기호 노론에 속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노사의 5대조인 기정익도 송시열 문하에 출입하면서 기호 노론의 학통을 이어받았다.

지금까지 연구에 의하면, 노사 철학이 17세기 이래 호남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해온 기호 노론의 학문적 입장을 수용하면서 발전하였으며, 노사 기정진 가문 또한 세도정치기에 호남지역 노론의 중심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만큼 17세기 이후 호남은 기호학파의 학문적 영향력이 컸고, 노론 학맥과 친연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사의 문인들은 노론 외에도 소론, 남인, 평민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특정한 학파의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기호 노론을 비롯하여 소론계, 남인계, 그리고 실학자 등 다양한 학풍이 공존했던 당시 호남학계의 특성 때문으로 파악된다.

노사의 연보에 따르면 그의 나이 45세 되던 해인 1842년 전설사 별제를 제수 받고 상경하였다가 곧바로 사직 낙향한 후 많은 제자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이듬해 그는 대표작인「납량사의」를 저술하고, 송시열이 사사된 곳에 세워진 정읍 고암서원(考巖書院)의 중수기를 지었다.

노사는 1877년 장성의 진원면 월송으로 옮겨가지 전까지는 주로 맥동이나 중동, 하사 등 필암서원(筆巖書院) 주1) 인근의 마을에서 강학 활동을 하였다. 그런 까닭에 노사의 문인들은 주로 광주와 담양, 장성 일대에 가장 많이 분포하였다. 그러나 노사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호남 각지와 경남 서부지역에까지 그의 학맥이 형성되어 갔다.

노사 기정진의 대표적 문인으로는 김석구(金錫龜), 정의림(鄭義林), 정재규(鄭載圭) 등 이른바 노문삼자(蘆門三子)와 노사를 주향으로 모신 고산서원(高山書院)에 함께 배향된 이최선(李最善), 김록휴(金祿休), 조성가(趙性家), 이희석(李僖錫), 조의곤(曺毅坤),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奇宇萬) 등이 있고, 그 외에 정시림(鄭時林), 최숙민(崔琡民), 오준선(吳駿善), 고광선(高光善), 기삼연(奇參衍) 등이 널리 알려졌다. 이 중 조성가, 정재규, 최숙민 등은 영남 출신이다.

노사의 수제자격인 노문삼자 가운데 김석구는 노사 사후 6년 만에 타계하였으므로, 영남에서는 정재규에 의해서 호남에서는 정의림 등에 의해서 노사의 학문이 계승되었다. 정의림은 고향 능주에서 강학활동을 펼쳤으며, 장성의 기우만과 함께 호남지역에서 노사학파의 확산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노사의 제자들은 여러 갈래의 문맥(門脈)을 형성하며 크게 확산되었다. 정재규의 문하에서 의령의 남정우(南廷瑀), 구례의 정기(鄭琦), 단성의 권재규(權載奎), 광양의 황철원(黃澈源) 등이 활동하였고, 기우만의 문하로는 영광의 이종택(李鍾宅), 공학원(孔學源), 능주의 양회갑(梁會甲), 옥과의 여창현(呂昌鉉), 광주의 김진현(金珍鉉), 장성의 기노백(奇老柏), 고창의 성경수(成卿修) 등이 노사학파를 대표하였다.

노사의 문인 가운데는 지주 출신이 많았고, 향촌 지식인으로서 서당을 운영하는 인물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장성의 김록휴 등의 울산 김씨 집안, 창평의 이최선 등 전주 이씨 집안, 광산의 오준선 집안 등은 토지를 비롯한 상당한 재력을 소유한 집안으로 알려져 있다.

또 기정진은 당대 호남지역 노론을 대표하는 장성의 김인후 가문이나 창평의 정철 가문, 광주 안청의 박상현 가문, 남평의 홍봉주 가문 등과 혼인이나 학문적 수수를 통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노사의 문인들의 경제적 기반과 노사의 인맥은 호남지역 내 노사학파의 네크워크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 결과 19세기 후반 노사 기정진은 간재 전우, 면암 최익현, 연재 송병선 등의 문인들과 함께 호남유학계의 커다란 학맥을 형성하였다. 다만, 홍영기 교수의 조사한 바에 의하면, 노사의 문인 중에는 면암의 문인과 중복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테면, 오준선, 박해량, 이지무(李枝茂) 등 십 수 명에 이른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홍 교수는 면암 문인과 노사 문인 사이에 활발한 교류가 이뤄졌다라고 해석한다.

1967년 간행된『노사선생연원록(蘆沙先生淵源錄)』에는 총 594명의 인물이 노사의 문인으로 등재되어 있다. 노사의 생전에 배출된 문인으로 볼 수 있는 이들의 95% 정도가 호남출신이다. 또 이들 대부분은 그 거주지가 호남의 중부지역에 해당하는 장성과 담양, 광주 일대를 중심으로 대체로 중부와 남부 일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반면, 전주 등 북부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 지역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1906년 최익현이 전북 태인으로 내려와 의병을 일으켰을 때, 주로 전북 지역의 유생들이 크게 동조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노사 기정진의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문인집단을 배출한 이는 그의 손자인 송사(松沙) 기우만이다. 『노사선생연원록』에 수록된 송사의 문인들은 1853년생부터 1904년생까지 1,194명이나 기록되어 있다. 송사의 문인들은 대체로 1880년대 이후부터 급증한 것으로 파악된다.

정의림과 그의 문인들에 의해 배출된 제자 및 그 다음 세대 문인들은 1967년 작성된『일신재선생연원록(日新齋先生淵源錄)』에서 그 개략적인 현황을 파악할 수 있다. 이를 분석한 김봉곤의 연구에 의하면, 정의림의 문인 60명에 의해 배출된 제2세대 문인은 2,625명, 제2세대 문인 33명에 의해 배출된 제3세대 문인도 1,247명이 된다. 정의림의 문인집단도 대체로 1880년대부터 급증하였으며, 그가 타계한 1910년대까지 계속 증가하였다. 정의림은 24세 때인 1868년에 장성의 하사로 노사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신 후 학문에 힘썼으며, 1884년 이후 본격적인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영남 출신으로는 노문삼자의 하나인 정재규를 비롯하여 최숙민, 이직현 등이 영남 서부지역에서 노사 학맥을 부식하는데 기여하였다. 이들의 강학활동을 통해 배출된 재전문인들은 수백 명을 상회하였으며, 진주, 단성, 산청, 삼가, 합천, 초계, 하동 등에 널리 분포하였다.

1879년 노사 기정진이 별세한 뒤 제자들은 스승의 유리설을 고수하여, 이를 전파하는 일에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노사 기정진의 문집인『노사집』을 1882년 목활자로 간행하였고, 그 중간본이 1898년 10월 재간행한 데 이어, 1902년 산청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미처 싣지 못한 글들을 추가한 문집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특히 중간본의 간행을 계기로 기호학계에서는 노사의 율곡 학문의 비판 여부를 둘러싸고 노사의 문인들과 전우, 송병선 등 기호 문인들 사이에 비판과 반비판이 반복되는 학문적 논쟁이 크게 일어났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노사학파는 호남지역과 경남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학파내의 결속을 다졌고, 이는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발전에 정신적,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노사를 중심으로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위정척사운동에 앞장섰던 노사의 문인들은 한말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들은 1895~1896년 이른바 을미의병(전기의병) 당시는 물론이고,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다시 일어난 후기의병 당시에도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구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896년 1월 유인석의 격문을 계기로 장성을 비롯한 담양, 창평, 광주, 순창 유생들이 의병운동을 일으켰을 때, 기우만을 비롯한 고광순, 기삼연, 김익중, 이승학, 박원영, 기주현, 고기주, 양상태, 기동관, 기재, 기동준, 정의림 등이 의병운동에 가담하였으며, 그들은 기우만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였다.

또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 이후 장성의 기우만과 합천의 정재규가 의병운동을 모색하였고, 창평의 고광순, 장성의 기삼연 등은 직접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1907년 1월 거의한 고광순은 지리산 피아골에서 장기항전을 모색하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1907년 10월 순국하였다. 기정진의 재종질인 기삼연은 1907년 10월 김익중 등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호남지역 의병항쟁을 주도하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는데, 1908년 2월 순국하였다.

고광순과 기삼연이 순국한 뒤 김준, 전수용, 김용구, 김영업 등 노사학맥을 이은 호남의 유생들이 의병을 계승하였다. 노사의 문하인 오준선은 의병부대를 후원하였으며, 그의 문인 중에는 전수용을 비롯하여 이기손, 오상렬, 오성술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또 노응현은 1907년 쌍산의소(雙山義所)의 지도부로 활동하였는데, 쌍산의소에는 면암 최익현 계열과 더불어 노사 기정진 계열이 의병 지도부를 구성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몇 가지 사례만 놓고 보더라도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노사학파의 문인들이 수행한 역할이 결코 작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노사 문인인 기재(奇宰)의 아들이자 고광순의 사위인 기산도는 오적암살단을 결성하여 매국노로 지목된 군부대신 이근택을 습격, 중상을 입힌 후 체포되었다. 그는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송금하려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일경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기에 판사를 지낸 기정진의 재종질 기동연(奇東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 실시에 따라 전라남도 독판으로 활동하였고, 기삼연의 제자였던 송진우는 신학문을 익혀 언론활동을 종사하였다. 이처럼 일제시기에 들어서도 노사학파의 인맥들은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여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주 1) 필암서원은 1662년(현종 3)에 사액된 서원으로 원장을 송준길, 유척기, 김원행, 김이안, 김종수, 심환지, 홍직필 등의 대표적인 노론 출신의 인물이 맡을 정도로 호남의 대표적인 노론계 서원이었다. 기정진 본인도 5대조 기정익이 송시열의 문인이 된 뒤 노론가문의 후예로서 필암서원 일대에서 강학하자 노론 성향의 많은 문도들이 영호남에서 모이게 되었다.

■ 주요 참고논문
- 김봉곤, 호남지역의 기정진 문인집단의 분석, 호남문화연구 제44집, 2009.
- 박학래, 노사학파의 지역적 전개양상과 사상적 특성, 국학연구 제15집, 2009.
- 고영진, 기정진학파의 학통과 사상적 특징, 대동문화연구 제30집, 2001.
- 홍영기, 노사학파의 형성과 위정척사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 제10집, 1999.
-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투쟁의 한 양상 –기삼연의 장성 봉기와 ‘호남창의회맹소’를 중심으로-, 전남문화재 제3집,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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