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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심(人心)의 대통일을 꿈꾼 노사의 '유리'철학의 세계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3회 인심(人心)의 대통일을 꿈꾼 노사의 ‘유리’철학의 세계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노사 기정진을 일컬어 흔히 실천적 지식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관직에 나아가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현실 정치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한 것은 사실이나, 그 또한 어디까지나 성리학자로서 노사 자신의 독특한 철학에 바탕을 둔 것이다.

노사는 우주 만물을 주재하는 근원적 실체는 오로지 이(理)일뿐이라고 인식하고, 기(氣)는 단지 이의 명령을 수행하는 종속적인 존재로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이른바 유리론(唯理論)의 철학을 정립하였다. 이러한 유리론의 세계관은 종전에 이와 기 가운데 기를 중요성을 강조한 주기론과 다르며, 또 이의 상대적 중요성을 강조하되 이와 기의 역할을 동시에 긍정하는 주리론과도 다른 노사만의 독특한 철학체계이다. 노사의 철학인 유리론은 한마디로 조선후기 성리학의 핵심 주제인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이’(理)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이’ 중심의 철학이다.

노사가 정립한 유리(唯理)의 철학은 영남의 주리론자나 기호의 주기론자들처럼 계보적인 사승(師承)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생 동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노사는 스스로 성리학에 전념하여 그 자신만의 ‘이’의 철학 체계를 정립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노사는 화담(花潭), 퇴계(退溪), 율곡(栗谷), 한주(寒洲), 녹문(鹿門)으로 더불어 이학(理學)의 6대가라고 지칭된다.

고려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주자의 이기철학은 조선 중엽에 이르러 퇴계의 주리론과 율곡의 주기론으로 정립되었다. 이후 퇴계의 학설을 지지하는 영남학파와 율곡의 학설을 지지하는 기호학파 사이에 공박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기적 입장의 호론(湖論)과 주리적 입장의 낙론(洛論)과의 시비는 임성주(任聖周)의 ‘기일분수’(氣一分殊)라는 기의 철학에 의해 유기론으로 정리되었고, 19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노사 기정진의 ‘이일분수’(理一分殊)라는 이(理)의 철학에 의해 유리론으로 정리되었다. 노사에 의하면 우주만물의 근본은 이일(理一)의 세계요 또 현상은 분수(分殊)의 세계인 것이다.

노사 철학의 핵심개념인 ‘이일분수’의 이(理)는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생성하는 근원적 실체, 즉 종자이다. 본체인 태극 면에서 보면 태극의 일리(一理)에는 이미 만유가 함유되어 있고, 현상인 동정(動靜)면에서 보면 일물(一物)에 일리(一理), 만물에 만리(萬理)가 있다. 또 체용(體用), 즉 몸과 쓰임의 논리로 보면, 이(理)의 일(一)과 분수는 서로 의존하여 성립되는 하나가 나뉘어 만물이 되고 만물이 동시에 하나인 것으로서 양자 사이에 층절이 없다. 한마디로 원융무애(圓融无涯)한 ‘이체이용’(理體理用)이 바로 노사의 이기관이다. 노사의 말을 빌리어 알기 쉽게 비유하면, 하나의 구리·철이 주발이나 칼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노사는 현상계에 있어서의 기의 발동과 운행은 이의 명령이나 시킴에 의한 것일 뿐, 현상계는 이 자체가 일(一)이면서 분수한 것이지 음양오행의 기로 인하여 분수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노사는 이처럼 ‘이’를 일과 분수의 통일체로 보고, 그 ‘이’ 속에서 수명자로서의 ‘기’의 역할을 인정하였다.

이와 기를 대거(對擧)하는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이는 존귀하고 기는 천하다는 이귀기천(理貴氣賤)의 입장을 취하였다. 한마디로 노사에게는 우주의 본체·본질은 오직 이가 있을 뿐이요, 기(氣)로 말하면 ‘이’ 가운데 내포한 세조리(細條理), 즉, 한 속성이요 한 방면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기역리중사(氣亦理中事)”, 즉 기 또한 이 안의 일이라는 것이 노사학설의 골자다.

성리학의 심성론(心性論)에서는 이일(理一)의 성(性)과 분수(分殊)의 성과의 관계, 또는 그 중의 어느 것을 위주로 하느냐에 따라 그 논의가 분분하였다. 노사는 본연지성(本然之性)인 ‘이일’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인 ‘분수’ 사이에는 단계적인 층절이 없다고 보았다. 본연지성을 위주로 말할 때는 만수의 성이 그 속에 함유되어 있고, 기질지성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이일이 그 속에 내재하는 것이어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호락논쟁’으로 불리우는 이 논쟁의 중심과제인 인물성동이(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으냐 다르냐)에 대해서도, 노사는 만물은 근원이 하나이므로 이의 본연(理一爲主)에는 인물성의 차이가 없고, 형기에 즉한 현실의 성(分殊爲主)에는 거기에 주어진 이(理)에 편전(偏全)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하여 호론과 낙론을 모두 비판하였다. 이러한 성(性)의 통합적 인식은 유리론의 연장선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주의 근원이 초감각적 ‘이’라는 것은 논외로 한다손 치더라도, ‘기’로 이루어진 현상 사물까지 모두 초감각적 ‘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상당히 극단적 견해로 비추어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전우(田愚) 등 당대의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이 잇달았고, 그 이론이 ‘공리공론’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노사의 위정척사론과 그의 유이론적 세계관은 서로 무관한 것일까?

노사 기정진이 일생을 은둔생활과 재야 학자로 보내면서도 ‘우국의 충정’이 대단하였음을 감안한다면, 그의 위정척사론이 지닌 ‘실천적 성격’은 결국 ‘이’(理)로서의 의리사상을 고취하여 민족이나 국가의 수호를 하는 데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즉 기정진에게 있어서 유리론은 자신의 위정척사적 정치사상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철학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노사에 의하면 주인이 하인을 시켜 일하는 것을 주인이 일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기가 비록 실제적인 작용을 한다 할지라도 이의 명령에 의한 것일 때 그것은 다름 아닌 이의 작용인 것이다. 이 때 이는 사물과 우주의 본체 혹은 필연이면서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당위)이기도 하다.

따라서 당위로서의 이는 노사의 사상 전체를 묶어주는 기강이요 구심점이다. 즉, 노사의 ‘이일분수설’은 가깝게는 그의 이일원론적(理一元論的) 존재론에 근거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사회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일정한 관련성을 지닌다.

노사의 주리적 경향이 마침내 철저한 유리론의 이일원론으로 심화되면서 이러한 관점은 현실인식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그는 사람의 이와 금수의 이를 엄격히 구별하고 이것을 중화와 오랑캐를 구별하는 ‘화이의식’(華夷意識)의 기초로 삼아 그 위에 ‘위정척사’의 이론적 근거를 세웠다.

노사의 현실인식은 바로 그 자시의 ‘이’ 철학을 현실에 대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이일분수설’은 주자학이 점차 권위를 잃어가던 시대적 분위기의 소산이자, 노사에 앞서 오랜 동안 깊이 지속 강화되어 온 ‘주리론’의 뿌리로부터 솟아 나온 극단화의 결과로 해석되기도 한다.

‘위정척사’를 기치로 내세운 ‘병인소’에서 보이는 노사의 서양에 대한 인식은 ‘이’를 극히 존대하는 유리론적 이기설을 근거로 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제 조선과 서양의 관계는 건정(乾淨)한 이(理)에 대하여 음욕의 사(私)와 이(利)가 휩싸인 기(氣)의 대립으로 설정된다. 그 결과 노사는 서양과의 통상 교류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사의 유리론은 19세기를 살아갔던 지식인의 현실적 위기에 대한 철학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당론으로 갈라지고 이론적으로 분열되었던 지배층과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천주교의 도전, 그리고 서양세력과 일본의 침략 등에 의해 국가 질서에 균열이 생기는 위기의 상황에서 그에게는 군민(君民)을 하나 묶는 인심의 대동(大同), 즉 ‘결인심’(結人心)의 가치관 정립이 무엇보다 절실하였다.

근본정신으로 돌아가서 조금도 인욕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선을 구현하는 것이 그의 절박한 현실적 욕구이자 소망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현실에서 구현되길 희망한 순수한 ‘이’의 세계가 아니었을까?

최근에 이러한 노사의 철학이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춘추의리’에 바탕을 둔 정조대왕의 대일통(大一通) 사상과 일맥상통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다. 즉 정조의 대일통 사상이 기정진의 일본만수(一本萬殊)의 이일분수(理一分殊) 철학이나 ‘결인심’의 내수책과 논리구조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정조는 명월(明月)이 각기 다른 만천(萬川)에 비친다는 이른바 ‘이일분수’ 사상을 전개하였다. 여기에서 명월은 ‘이일’로서 태극인 군주이며, 만천은 ‘만수’(萬殊)로서 만물 즉 모든 신민으로 이해된다. 정조는 물(物)마다 태극이 되어 그 성(性)을 어기지 않고 하나의 태극을 구현하는 경지를 참다운 명월과 만천 관계로 비정하여 강력한 군주권 하에 신민의 단일화, 즉 ‘군민일체’(君民一體)를 주장하였다.

물론 유이의 철학에 기반한 노사의 현실인식은 기왕의 척사론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도 분명하다. 그러나 내수외양론을 통해서 국가적 위기의 원인을 외세의 압력 뿐 만 아니라 정치체제의 내재적 모순에서 찾은 점, 그리고 ‘결인심’을 주창하여 위기 극복의 주체를 민중으로 인식한 것 등은 당시 무너져가던 봉건적 사회 현실에 대한 통찰과 사색의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노사의 사상은 집권층의 야욕과 부패로 인한 봉건체제의 위기를 개탄하고 있던 재야 지식인들로부터 상당한 공감을 얻었다. 노사의 나이 45세를 전후로 명성이 알려지면서 그의 철학 또한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노사학파의 사상은 세 가지 방향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첫째는 정치적 실천으로서의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둘째는 이의 철학으로서 유리론의 계승과 발전, 셋째는 일본의 침략에 맞선 반일구국운동으로서의 의병항쟁의 전개 등이 그것이다.

참고문헌
- 현상윤, 조선유학사, 민중서관, 1949.
- 송인창, 노사 기정진의 철학과 현실인식, 대전대학논문집 2. 1983.
- 이상곤, 노사 기정진의 理一分殊觀, 원불교사상 제10·11집, 1987.
- 안진오, 근대 유학과 호남 성리학의 특징, 호남유학의 탐구, 이회, 1996.
- 김봉곤, 노사 기정진의 사상의 형성과 위정척사운동, 조선시대사학보 3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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