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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세기 산림 지식인 노사의 현실 인식과 실천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2회 : 산림 지식인 노사의 현실 인식과 실천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산림(山林)의 원래 사전적 의미는 관직을 하지 않고 은거한 인물을 상징하는 수사적 표현이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초야에 있으면서도 한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며, 국정의 방향과 운영에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림의 명망가이자 지역 사대부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사 기정진은 19세기의 전형적인 산림 지식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기정진은 1798년에 태어나 1879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평생을 재야에 묻혀 살았으나, 그 명성은 호남의 지역적 울타리를 넘어 경향각지로 알려졌다.

노사 기정진은 전북 순창에서 태어났으나, 18세 되던 1816년 부모를 한꺼번에 여의고 이후에는 전남 장성에서 주로 살았다. 연보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가 장성 하남(河南)에서 순창 조동(槽洞)으로 이사하여 살 때 금빛 대인이 한 남자 아이를 안아 주는 꿈꾸고 노사를 낳았다 하여 어려서는 자를 금사(金賜)라고 하였다. 기정진은 자를 뒤에 대중(大中 후에 大仲)로 바꿨다.

본관이 행주인 그의 집안은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기대승(奇大升, 1527~1572)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그의 직계는 그리 현달하지는 못했다. 그의 집안이 장성에 뿌리를 내린 것은 중종 기묘사화 때 기묘명현인 기준(奇遵)의 형제들로부터 비롯된다.

준의 중형인 원(遠)의 손자 효간(孝諫, 1530~1593)은 임진왜란 때 장성의 이른바 남문창의(南門倡義)에 참여하였으며, 중종 때의 유명한 학자 하서(河西) 김인후에게서 배웠다. 노사의 5대조 정익(1627~1690)은 우암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조부 기태랑과 아버지 기재우가 이조 참의와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나 실제 벼슬은 한 것은 아니었다.

노사는 말을 배우면서 바로 문자를 터득하기 시작하였다. 네 살이 되던 해 노사가 공부하기를 청하자, 그의 아버지는 마른 몸에 병치레가 잦다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부터 효경과 격몽요결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일곱 살 때는 이미 소학을 읽고 여덟 살 되던 해는 통감강목과 춘추사전을 완독했다고 전해진다.

또 일찍부터 노사의 문재를 알아본 그의 종조부가 시재(詩才)를 시험하자 여섯 살 나이에 거침없이 시를 짓는 것을 보고 그의 아버지는 세상에 내놓을 인재가 될 것이라며 집안의 경사라고 기뻐하였다.

그가 점차 신동으로 소문이 나면서 11세 때 순창 군수가 쌀과 고기를 보내면서 한번 만나보기를 청했다고도 한다. 그만큼 노사는 일찍이 글재주가 뛰어났다. 10세 되는 시기부터 장성의 백암사, 문수사의 남암, 관불암 등 조용한 산방과 산사를 찾아 유교 경전을 탐독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특히 그는 남암과 관불암을 자주 찾았다.

노사에게 이렇다 할 사승 관계가 없는 것으로 보면, 그는 스승 없이 홀로 독서와 사색으로 학문을 쌓아 성리학자로 이름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유리론이라는 그만의 독자적인 학설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의 이러한 독자적인 수학 과정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14세 되던 해 노사는 하서 김인후의 후손인 울산 김씨와 혼인하였으며, 4년 후에는 부모상을 동시에 당하였다. 이후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삼십대 초반에 향시에 응하였으며, 34살에는 사마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증광시에 응시하여 떨어지자 과거를 단념하고 낙향하였다.

그는 강릉 참봉(35세), 사옹원 주부(40세), 전설사 별제(45세), 무장현감(60세), 사헌부 장령(64세), 사헌부 지평(67세), 동부승지(69세), 호조 참의(69세), 공조 참판(69세) 등의 벼슬을 제수 받았다. 그러나 전설사 별제로 엿새 동안 근무한 것 이외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노사는 40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학문을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연보에 따르면 그는 문수사의 남암에 피서하던 중에 최초의 저작인「납량사의(納凉私議, 45세)」을 완성하였다. 이 저술은 곧바로 발표하지 않고 집안에 보관해 두었다가 76세에 몇 구절을 수정한 후 공개하였다. 납량사의는 노사의 학설을 대표하는 저술인데, 선배들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독자적인 논리를 제시한 것이다.

납량사의에 이어 그는「정자설(定字說, 47세)」,「우기(偶記, 47세)」,「이통설(理通說, 55세)」,「외필(猥筆, 80세)」등과 같은 성리학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납량사의」,「이통설」,「외필」은 노사의 3대 저술로 꼽힌다.

그가 제시한 학설은 논쟁적이고 실천적인 성격이 강했는데,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그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실천적 자세와도 일치하였다. 그는 1862년 농민항쟁(임술민란)이 일어나자 그 대응책으로「임술의책(壬戌擬策)」을 내놓았으며,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병인소(丙寅疏)」라는 상소를 올려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에 불을 지폈다.

노사는 1862년의 농민항쟁을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였다. 삼정의 문란에서 그 원인을 찾은 노사는 농민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 양민(養民) 위주의 개혁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그 해결책으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제시한 방안을 인용하여 제반 분야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그는 전정의 개혁 일환으로 병작반수(竝作半收)의 토지정책을 개선하여 1/10세 제도를 추진할 것과 아전의 횡포에 대한 근절을 역설했다. 또 금전수수가 관행화된 과거제의 부조리를 뿌리 뽑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처럼 전정의 문란은 사람을 잘못 기용하는 데 있으므로 인사를 바르게 할 것이며, 군정은 군포를 폐지하고, 환곡은 상평으로 대치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또 토지소유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민전을 제한할 것도 주장하였다. 그는 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는 인사 문제를 비롯하여 보다 혁신적인 제도적 개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노사는 조정에서 ‘사태 해결’의 자문을 양반과 유생들에게 요구하자, 그에 대한 응답으로「임술의책」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노사는 이 시무책의 말미에 과거 응시의 예와 같이 작성자의 이름 등을 밝히라는 조정의 방침에 크게 실망하여 이를 불살라 버리라고 하였으나, 아들 만연이 비장(秘藏)하였다가 후에 노사의 문집에 실렸다.

위정척사운동의 도화선이 된 노사의 두 번째 시무상소인「병인소」는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 음력 7월에 작성되었다. 이때 노사는 이항로와 더불어 사교를 배척하고자 항의하였고, 대외개방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외세의 침략에 대비해 국방력의 강화를 역설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내정의 쇄신이 전제되어야 했다. 한마디로 ‘내수외양(內修外攘)’의 방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가 제시한 내정개혁의 핵심은 인심의 결집, 즉 ‘결인심(結人心)’을 이루는 것이며, ‘결인심’의 요체는 올바른 인재 등용에 있었다. 더불어 그는 사대부에게 군역 부담을 지울 것과 무용한 서원을 개혁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진 조선왕조 사회의 근본적 개혁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원했던 것은 성리학의 이념이 구현된 안정적 신분제적 구질서의 회복이었다. 즉,「병인소」에서 노사는 서양세력의 통상 요구를 조선 고유의 질서를 파괴하는 조선의 정통성과 주체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다. 성리학적 질서를 ‘정(정의)’으로 보아 보위하고, 천주교나 서양세력을 ‘사(사악)’로 인식하여 배척하는 위정척사의 논리를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노사는 병인양요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서 ‘위정척사’의 명분을 내세워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노사는 서양세력이 천주교의 포교를 명분으로 간첩을 파견하고 통상을 명분으로 잠행하여 30년이나 치밀하게 지형을 탐색하고 무력의 허점을 알아서 쳐들어 왔으니 조상들이 임진왜란의 의병에 참가했듯이 거의에 참여하자고 종용하였다.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기초하여 거병을 추진하다가 소모사가 파견된다는 소식을 듣고서 중지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문인인 이최선(李最善)이 의병을 일으켜 서울로 떠나자, 시를 지어 “백성 위해 기의하였으니, 경서를 읽는 것이 창을 휘두르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라고 격려하였다. 그의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뒷날 그의 손자인 기우만과 집안 조카인 기삼연에게 계승되었다.

노사는 장수한 편이었지만, 평생 병마를 많이 겪었다. 여섯 살 때 천연두를 앓은 후 왼쪽 눈을 손상하였다. 스물한 살의 한창 나이에 스스로 ‘다질(多疾)’이라 말할 정도였고, 한 때 ‘노하병부’라고 자칭한 것도 그만큼 병치레를 많이 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노사는 1815년 음력 5월 이틀 사이를 두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거푸 잃고 순창에서 장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그는 이후 죽을 때까지 하남, 맥동, 맥곡 등을 전전하며 10여 차례 이상 이거하였다. 이처럼 그가 자주 이사한 것도 신병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옮겨 다닌 곳은 전라남도 장성과 광주 등지로 주로 행주 기씨 세거지였다. 77세에 지은 ‘노사’라는 호는 노산(蘆山) 아래의 하사(下沙)에 산다는 의미에서 붙인 자호였다. 그 이전에는 잠수(潛叟), 지리수(支離叟), 공동자(倥侗子), 무명와(無名窩), 노하병부(蘆下病夫) 등을 사용하였다.

* 위 글은 『노사선생문집』에 부록으로 실린「연보」와「행장」등을 바탕으로 송인창,「노사 기정진의 철학과 현실인식」,『대전대학 논문집』2, 1983 ; 홍영기,「노사학파의 형성과 척사위정운동」,『한국근현대사연구』제10집, 1999 ; 고영진,「노사학파의 학통과 사상적 특성」,『대동문화연구』제39집, 2001 ; 김봉곤,「노사 기정진의 사상의 형성과 척사위정운동」,『조선시대사학보』30, 2004 등의 논문을 참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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