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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9세기 조선사회의 위기와 노사 사상의 태동
작성자 홍순권
내용

장성 행주기씨와 한말의병

제1회 : 19세기 조선사회의 위기와 노사 사상의 태동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었던 19세기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한국 역사의 이행기라고 할 수 있다. 이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 인물 가운데 노사 기정진만큼 사상적으로 우리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도 흔하지 않다.

그는 오늘날 조선 성리학의 6대가 또는 근세유학의 3대가로 평가 받고 있다. 또 화서 이항로와 더불어 19세기 위정척사사상을 정립하였을 뿐 만 아니라 한말 의병운동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한말 호남의 의병 지도자 가운데 상당수의 인물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우리나라 근대사에 미친 영향의 폭을 짐작케 한다.

노사 기정진 선생은 1798년 전북 순창군 복흥면 조동에서 태어났다. 노사가 태어난 해는 정조 22년으로 개혁 군주 정조의 치세가 정점에 이르던 시점이었다. 불행히도 정조는 2년 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정조가 죽자, 그동안 ‘준론탕평’(峻論蕩平)을 앞세워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관리되어 왔던 정국 운영의 기틀이 무너지고, 봉건체제의 사회적 기반에 금이 가기 시작하였다. 세도세자의 죽음 문제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간 권력 다툼 끝에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등 소수의 노론 가문에 의해 권력이 농단되는 세도정치가 전개된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정치적 암흑기에 들어섰다.

임란과 호란 등 두 차례 전란을 겪은 조선사회는 17세기 이후 점차 사회질서의 회복하면서 농업을 중심으로 사회적 생산력이 증가하고,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는 가운데 문화적 난숙기를 맞이하였다. 혹자는 이 시기를 ‘조선의 르네상스기’라고도 표현한다. 즉, 영조와 정조의 치세에 이르러서 실학이 발달하고, 민중문학의 성숙과 함께 판소리, 진경산수화 등 새로운 양식의 문화 예술이 만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조 사후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 등 일부 노론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동안 조선의 정치는 부패해 갔고, 지주제에 기반을 둔 조선의 봉건체제는 심각한 모순과 위기적 징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세도정권은 봉건체제의 모순을 개혁하기보다는 오히려 봉건적 착취를 강화함으로써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만 급급하였다. 그러는 와중에서 탐관오리들에 의한 매관매직과 부정부패가 성행하고, 이로 인하여 국가 재정의 기반은 약화되고 부실화되어 갔다.

이서배 등 중간 관리들이 나라 곳간을 도둑질하는 일이 만연하였고, 또 그 결과 발생한 재정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서 힘없는 백성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가혹하게 하다 보니 국가 재정인 이른바 ‘삼정’이 문란해졌다.

조선시대 삼정의 하나인 전정은 토지소유자로부터 세를 징수하는 것이고, 군정은 성인 남자에게 부과하는 군역을 대신한 인두세이다. 삼정의 또 다른 하나인 환곡은 본래는 상평창 제도(주 1)로 기능했던 것이 강제적 세금으로 변질된 것이다.

(주 1) 우리나라 중세 때 진휼과 군자(軍資)를 목적으로 가을 수확기에 관청에서 미리 곡물을 사 창고에 저장했다가 춘궁기 등에 이자를 붙여 방출하였던 제도.

지주들의 착취와 중간관리들의 세금 수탈에 더하여, 양전(토지조사)의 미실시로 인한 전세 부과의 불균등, 양반들의 탈루로 인한 군역세 부담의 과중, 환곡미의 강제적 징수 등 삼정제도의 총체적 문란은 농민들의 큰 불만과 원성을 샀다.

정조의 죽음 직후 일어난 신유사옥의 희생자로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다산 정약용은 배냇물도 안 마른 갓난아이를 군적에 올리고 군포를 내지 않은 이유로 소를 끌고 간 세리를 원망하며, 자신의 양물을 끊은 농민의 실화를 듣고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를 썼다. 다산은 이 시를 통해서 당시 횡행하던 이른바 ‘황구첨정’(黃口簽丁)(주 2)의 군역세 피해를 적나라하게 고발하였다.

(주 2) 황구는 새 새끼의 주둥이가 노랗다는 데서 유래한 말로 갓난 아이를 가리킨다. 첨정은 군적에 올리는 것을 말한다. 당시 군정의 문란으로 어린아이를 군적에 올리는 불법적인 일이 횡행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군정 등 삼정의 문란으로 인하여 봉건적 착취와 세 부담이 가중되자, 이를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이른바 ‘민란’(농민봉기)을 일으켜 저항하였다. 그리하여 역사학자들은 19세기 한국역사를 가리켜 이른바 ‘민란의 시대’라고 일컫는다. 19세기 들어서 군 단위를 넘어선 최초의 대규모 농민봉기는 1811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이 난’이다. 봉건적 착취와 지역차별에 반발하여 일어난 이 서북지역의 농민 봉기가 진압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되었다.

19세기 들어서 각 고을에서 발생하던 크고 작은 민란이 철종조인 1862년에 이르러서는 한 해 동안 무려 71개 읍 이상의 곳에서 발생했다. 특히 충청, 전라, 경상 지방에서 많이 일어나 ‘삼남민란’이라고도 하고, 그 해의 간지를 빌리어 ‘임술민란’이라고도 불리었다. 이후에도 계속된 농민봉기는 마침내 1894년에 일어난 농민전쟁(일명, ‘갑오동학농민운동’)으로 귀결되었다.

19세기는 이처럼 안으로는 봉건 지배층의 탐학과 제도적 모순이 극에 달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밖으로부터는 외세의 압력이 가중되어 나라 안팎의 위기가 점증해 가던 시기였다. 19세기 들어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리던 서양배가 우리나라 해안에 나타나는 현상이 빈번해졌다.

배질 홀 대위가 영국의 이양선을 몰고 와 충청도 서해안에 도착하여 비인 현감 이승렬을 그림으로 그려 세인트헬레나 섬의 나폴레옹에게 보여주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것은 노사 기정진이 18세가 되던 해의 일이다.

이후에도 우리나라 해안의 이양선 출몰을 지속되었다. 이양선의 잦은 출몰은 조선의 지배층과 유학자들로 하여금 서양에 대한 위기의식과 함께 조선후기 이래 전파된 천주교에 대한 적대감을 더욱 고취시켰다. 그 결과 최초의 천주교 박해사건인 1791년 신해박해를 비롯하여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계속되었다.

서세동점의 파고는 조선에 앞서 먼저 중국(청)을 덮쳤다. 일찍이 인도 경영을 발판으로 중국 공략을 노리고 있던 영국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대중국 통상의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하여 인도산 아편을 밀수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정부는 수차에 걸쳐 아편금령을 내렸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급기야 영국의 밀수 상인들에 대해서 강경책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에 걸쳐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영국의 제국주의적 침략 야욕에서 비롯된 아편전쟁에서 중국은 영국에 패하여 막대한 배상금에다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중국의 패배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의 지배층은 대외적 위기감 속에서 서양과의 통상을 금하는 정책을 강화하면서 대응책에 부심하였다. 그러나 권력 독점의 단맛에 흠뻑 취해 있던 세도정권에게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의 극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임술민란 이듬해인 1863년 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새 임금으로 고종이 즉위하였다. 고종은 즉위 당시 나이가 불과 12세였기 때문에 조정의 실권은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에게 돌아갔다. 대원군은 집권하자 안동김씨 등의 세도정권의 권력기반을 해체하고 대내적으로 강력한 개혁정책을 추진하면서 왕실의 권위 회복과 왕권 강화 정책을 모색하였다.

그는 면세 대상이었던 양반에게도 군역세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실시하고, 농민 수탈기관으로 변질된 많은 서원들을 철폐하고, 환곡제도를 개혁하여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반면, 대원군은 서양 각국의 통상요구에 대해서는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미국 함선이 대동강으로 진입했다가 패퇴한 제너널셔먼호 사건(1866년),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한 병인양요(1866년), 제너널셔먼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국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1871년)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열강의 침략에 대해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싸움을 독려하고 군비를 강화하여 대응하였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로 인한 폐단을 일부 시정하여 일시적으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기도 하였으나, 그가 봉건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을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또 그의 개혁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수 양반세력의 반발과 경복궁 중건에 따른 조세 부담 등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으로 대원군의 치세도 10년을 넘기지 못하였다.

대원군이 물러나고 얼마 안 되어 조선정부는 일본의 무력시위에 굴복하여(운요호 사건) 1876년 일본과 ‘조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고 부산항을 필두로 원산항과 인천항을 잇달아 개방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일본을 비롯하여 구미의 여러 나라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되었으나, 역사의 파고는 조선을 더욱 더 위태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이(理)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유리론’(唯理論)에 입각하여 현실의 모순을 타개할 해결책으로 내정 개혁과 위정척사의 방향을 제시한 노사 기정진의 사상은 바로 이러한 위기적, 전환기적 역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싹트고 개화하였다.
 

담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