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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창 문수사에 진을 치다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12회 고창 문수사에 진을 치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장성 수연산에서 기삼연이 또 다시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뜻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대한매일신보사 여러분에게>라는 글에서 기삼연이 밝힌 바로는 그가 수연산에서 거의한 날자는 정미년(1907) 음력 8월 9일(양력 9월 16일)이다.

그런데 후은(後隱) 김용구(金容球)가 쓴 <<의소일기>> 정미 8월 8일(음력) 기사에는 “성재와 함께 나라를 찾고 원수를 갚고자 동맹하여 거의할 것을 하늘과 땅에 고하고 피를 마셔 함께 맹세하였다”고 되어 있다. 김용구는 기삼연과의 약속에 따라 음력 8월 11일 영광에서 별도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거의하였다.

이를 종합해 보면, 8월 9일 기삼연이 먼저 호남창의회맹소의 결성과 동시에 수연산에서 거의하고, 이어서 김용구가 영광으로 돌아가 8월 11일 별도의 의병부대를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한 8월 9일 수연산에 모여든 의병이 무려 5백 명에 이르렀다. 이 날 호남창의회맹소 대장으로 추대된 기삼연은 자신의 거의 사실을 전국에 알려 각 지방 의병세력의 봉기를 고무하고 호응을 기대할 목적으로 당시 대표적인 반일 언론인 대한매일신보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보냈다.

“나라가 부서지고 집이 망하였습니다. 조종의 국토에 함께 태어나서 부모의 몸을 각기 가진 자로서 누군들 자나 깨나 원통하고 울부짖으며 저 왜적에게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겠습니까........조정에 가득한 것이 저 왜적의 노예 아닌 것이 없으며, 온 나라에 저 왜적의 점탈 없는 데가 없고, 심지어는 근왕한 것을 궁궐을 범하였다 하고 의병 일으킨 것을 반란이라 하여 드디어 충신 의사로 하여금 손발을 놀릴 수 없게 만들었으니, 나라 망한 원통함과 집을 망친 분함은 아마 피차가 생각이 같으리다..... 전라도 시골에 한평생 살아서 능히 당세의 대인군자를 두루 사귀어 면면히 가르침을 청하지 못하였고, 기특한 포부를 가지고 충의를 실천하는 선비들이 혹은 서로 알지 못하고 서로 듣지 못한 이도 있을 것입니다. 왜적들이 횡행함에 길이 막히어 끊어졌고 여기저기에서 새로 모여든 군사들이 되어 모든 일이 초창기에 있어 사방에 선전하여 포고할 방법이 었습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여러 군자께서는 춘추의 대의로 곧은 붓을 잡아 신문사에 몸 담은 자의 손으로 역사의 일기를 기록하여 천지의 바른 윤리를 들어 인민의 귀와 눈을 넓히면, 인의로 성벽을 삼고 필묵이 무기가 되어, 시골군사 10만 명보다 나을 것이오니, 더욱 높고 깊게 힘쓰시오.

삼가 통고하는 글 하나를 올려 보내 드리오니 혹시 물리치지 마시고 신문에 기재하여 널리 유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오직 신문사에 계신 여러 군자의 재량에 달렸으니, 밝게 살펴주십시오. 각주1)“

각주 1) <<성재기선생거의록 약초>>(권2) 「첩황(貼黃)」에 붙어 있는 이 글은 실제 첩황과는 별개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송사선생문집십유>>에는 <上大韓每日申報社諸位>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아마 별개로 작성된 글이 <<성재기선생거의록 약초>>(권2)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착오로 한 데 묶인 것으로 보인다.

기삼연이 수연산에서 봉기하여 격문을 날릴 당시는 러일전쟁 이후 재기한 의병들의 항일투쟁의 봉화가 전국 각지로 확산되어 가던 시기였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기화로 이른바 을사오적을 앞세우고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국권을 빼앗을 뿐 만 아니라, 조선 민중의 저항을 염려하여 대규모의 일본군 병력을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고, 이를 근거로 함경도 일대에 군정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청일전쟁 이래로 서울, 원산, 부산에 배치한 1개 대대의 한국주차대 조직을 해체하고, 대본영 직속으로 한국주차군사령부를 편성하여 병력을 증강하였다. 한국주차군은 ‘한국주차군사령부’ 아래 주차사단(수비대)과 주차헌병대를 주 병력으로 하고 기타 예하부대와 함께 편성되었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일제는 1904년 4월 3일 서울에 한국주차군사령부를 설치하여 사령관직에 소장급을 배속하였고, 1904년 9월 7일에는 사령부 조직을 확대하고 주차군사령관직에 대장(혹은 중장)급을 배속하였다.

일제는 러일전쟁 중 ‘군사경찰훈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치안을 일본군이 담당하도록 하고 열차운행을 방해하거나 전신줄을 끊는 사람은 군율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 일본군은 철도나 전신선을 파괴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조선인을 공개 처형하는 등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저항하는 조선 민중을 무참히 학살하였다. 이것은 이후 전개되는 의병 집단학살의 전주곡이었다. 러일전쟁 종결 후 일제는 한국주차군의 2사단 체제를 확정하고 제13사단과 제15사단을 한반도에 주둔시켰다. 이로써 의병 봉기에 대비한 일본군대의 한반도 주둔 계획이 일단 완료되었다.

그런데 1907년 7월 일제는 본국으로부터 1개 여단 병력을 긴급 증파하여 대구에 여단본부를 두고 남부수비관구를 보강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을 염두에 두고 해산 군인들의 저항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때 증파된 제12여단은 일본군 23사단 중 최강을 자랑하는 정예부대였다.

1907년 8월 1일부터 9월 3일에 걸쳐 일제가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자, 그들의 예상대로 다수의 해산 군인들이 결사항전에 돌입하였다. 우선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의 박승환 대대장이 일제의 강제적 군대 해산에 항의하여 자살한 것을 계기로 서울에서 군대 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자극 받은 지방의 진위대에서도 많은 군인들의 봉기와 탈출이 잇달았다. 그 현저한 예가 민용호가 중심이 된 원산진위대와 지홍윤·연기우 등의 지휘하에 봉기한 강화도 진위대 병사들의 대일항전이었다. 항전이 진행되면서 각 지방에서 봉기한 진위대 병사들은 의병대열에 합류하였다.

해산 군인들이 의병부대와 연합하거나 또는 의병부대에 가담하는 방식으로 항일투쟁을 벌여나가면서 의병운동은 명실공히 전국적 차원 ‘항일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해산군인과 의병들의 저항이 예상 밖으로 커지자, 일제는 1907년 10월 초 기병 1개 연대(4개 중대로 편성)를 더 추가하여 조선에 파견하고, 또 강릉과 인천에는 수뢰정까지 파견하여 연안의 의병 진압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였다.
1907년 10월 초 파견된 기병연대는 한국주차군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好道)가 본국 정부에 증원 요청하여 파견된 부대였다. 이 기병대는 서울, 조치원, 대구, 전주 등 주로 남부지역에 배치되었다. 이는 의병 활동의 중심지가 강원에서 경북 그리고 점차 충청 이남의 호남지역으로 이동한 탓이었다. 기병대는 전국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되는 의병들의 게릴라식 항전에 기동성 있게 대응을 위해서 필요하였다.

이후 의병들의 거점이 호남지역으로 이동함에 따라 전라남북도에 집중 배치되었다가 1909년 가을 ‘남한대토벌작전’을 수행하고 대토벌의 임무를 마친 직후인 1909년 11월에야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한국주차군은 1908년 5월 병력의 증파를 본국에 다시 요청하여, 보병 2개 연대를 더 지원받았다. 그 중 1개 연대인 제7사단 27연대는 원산에 상륙하고, 다른 1개 연대인 제6사단 23연대는 마산에 상륙하여 각각 북부지역과 남부지역의 의병 진압 병력을 보강하였다. 주로 화승총이나 창, 칼 등 구식의 원시적 무기로 무장한 의병 진압을 이처럼 많은 병력을 조선에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군 병력만으로는 의병을 조속히 진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보조 병력으로 헌병과 경찰력을 증강하였다. 1906년 당시 일본의 한국주차군헌병대 병력은 1,162명으로, 이들의 역할은 2,679명의 경찰을 보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07년에는 헌병을 2천여 명으로 두 배로 늘리고, 경찰도 4,952명으로 늘렸다. 1908년에는 다시 헌병을 6,608명으로 3배 이상이나 더 늘리고 경찰은 4,991명 선을 유지하였다. 1908년 6월에는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4천여 명을 모집하여 의병을 진압할 때 일본 헌병의 앞잡이로 삼았다.

이처럼 일제는 경찰보다는 군 병력이나 헌병 병력을 앞세워 의병을 ‘토벌’하였다. 이러한 의병 진압 방식은 모든 조선인에 대한 통치방식으로 적용되어 1910년 강제 병합 이후 무단통치의 수단인 헌병경찰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일제는 군과 경찰 병력 이외에도 일찍부터 일진회와 자위단 등 친일세력을 지원하고 조직하여 이들을 의병을 색출하고 탄압 학살하는 일에 이용하였다. 일진회는 1904년 8월 송병준이 조직한 뒤 이용구의 동학조직을 끌어들여 만들어진 한말의 대표적인 친일단체였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 지회를 두고 일제의 밀정 노릇과 ‘토벌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자위단은 일진회의 청원에 의해 일제에 의해 1907년 11월 조직되었다. 일제는 자위단이라는 미명하에 지방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과 친일세력을 묶고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이들을 무장시키고 일본군 ‘토벌대’의 보조병력 내지 지원부대로 활용하였다.

기삼연의 의병부대는 다른 의병부대와 마찬가지로 일본군대와 경찰을 공격하여 이들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면서도, 일진회원와 자위단원, 그리고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세금을 징수하는 공전영수원과 친일관리 등 조선인 친일세력에 대한 응징까지도 투쟁목표로 삼았다. 물론 호남지역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들 또한 주요한 공격 대상이었다.

이리하여 기삼연 의병부대는 1907년 10월 21일 영광과 무장(현 전북 고창)에서 전주(電柱)을 파괴하고 마을에 숨어있는 일진회원 1명과 천도교인 1명을 처형하고,각주 2) 바로 고창 문수사로 들어갔다. 기삼연이 문수사에 진을 친 것은 막장으로 있는 박영건(朴永健), 정원숙(鄭元淑) 등 고장 출신 간부들의 권고에 의한 것으로 고창성을 공략하기 위한 예비책이었다. 문수사는 현재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에 있는 절이다. 의병을 이끌고 고창의 문수사에 기삼연이 입성하자, 이에 관한 정보를 입수한 일제는 우선 약간의 병력을 동원하여 선제공격을 가해 왔다.

각주 2) 이 사실은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 3)에 실린 내용과 일제가 작성하여 편책한 <<전남폭도사>>의 내용이 일치한다.<<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 3)에서는 “동학당으로서 머리를 깍고 왜적의 창귀가 된자들”이라고 하였고, <<전남폭도사>>에서는 “천도교인 김모와 일진회원 최모”라고 적고 있다. <<전남폭도사>>는 1906년 1월부터 1909년 12월까지 전라남도에서 일어난 의병에 대한 일본군경의 진압 상황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한 갑종 기밀문서로 1913년 일경(日警) 전라남도 경무과에서 편찬하였다. 이 자료는 1977년 <<비록 한말전남의병투쟁사>>(이일룡 역, 전남일보 인서관 간행)라는 제목으로 원문과 함께 번역 간행된 바 있다.

<<전남폭도사>>에 의하면, 당시 일제 측에서는 법성포주재소, 영광분파소, 고창, 무장의 각 분파소가 합동 수색하여 고창군 문수사에 웅거하는 기삼연의 부하 50명을 공격하였으나 탄환이 떨어져 퇴각하였다. 일제 측의 기록에는 피아간의 피해 상황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 3)에는 적 수십 명을 베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양측 간 치열한 교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참고문헌

성재 기선생 거의록 약초<권1~권3>(기우만 편, <<호남의병장열전>> 所收)
김용구 편, <<의소일기>>
김동수, <의병열전>(전남일보, 1976년 12월 8일 ~ 1977년 1월 14일자)
강길원, <성재 기삼연의 항일투쟁>, <<한국독립운동사논총>>(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 편, 1992)
홍순권, <<한말 호남지역 의병운동사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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