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명소

도지정유산

Do designated heritage property

국가유산명 봉암서원
소재지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화차길 159
규 모 부지 670평, 건물 7동 103평
분 류 기념물

상세정보

˚봉안인물 : 6위

》주향 : 망암 변이중

》종향 : 자하 변경윤, 율정 윤진, 청류당 변휴, 휴암 변윤중, 명산 변덕윤

 

이 서원은 조선(朝鮮) 숙종(肅宗) 23년(1697)에 망암(望菴) 변이중(邊以中)(1546∼1611)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해 훼철되었던 것을 1976년 유림(儒林)과 후손(後孫)들이 1차 중건하였고, 1984년 새로 복원하였다. 망암 변이중 선생은 선조(宣祖) 5년(1572) 사마시(司馬試)를 거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화차(火車)와 총통(銃筒)을 발명하고 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 장군(將軍)을 지원, 행주대첩(幸州大捷)을 이루게 한 분이다. 변이중 선생은 이곳 사당에 주향(主享)되었고, 임진왜란 때 입암산성(笠岩山城)에서 순절한 윤진(尹軫) 장군(將軍), 광해군(光海君) 때의 간신 이이첨(李爾瞻) 등을 상소공책(上疏攻責)하였던 자하(紫霞) 변경윤(邊慶胤) 선생을 배향하였으며, 숙종조(肅宗朝) 대유학자인 청류당(廳流堂) 변휴(邊烋) 선생을 추배(追配)하였다. 경내에는 외삼문(外三門), 강당(講堂), 동(東)·서(西) 양재(兩齋)로 강학공간(講學空間)을, 내삼문(內三門), 사당(祠堂)으로 배향공간(配享空間)을 이루어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고 있다.

 

화차전시관(시징당)

》규모 : 전시관 35평, 주차장 555평, 관리사 등

》전시물 : 화차 3종, 총통 14종, 화살 11종, 신기전 6종, 포통 8종

망암 변이중 선생

 

명종 1년(1546년) 장안마을에서 태어나 27세에 문과에 합격한 후 예조좌랑, 형조좌랑을 거처 47세 때 어천찰방에 재직 시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대왕의 파천길을 수행하고 의주까지 갔다가 소모어사의 명을 받아 전라도에 내려와 많은 의병과 의곡을 모집하여 전선으로 보내는 한편 수원에 진을 치고 기호지방의 왜적들에게 항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선생은 왜군의 조총을 능가할 수 있는 화차를 구상하여 종제인 휴암 변윤중의 도움을 받아 화차 300량을 제작하였다. 이 화차는 임진왜란 시 3대 발명품의 하나로 권율장군에게 40량을 보내어 행주대첩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경주 탈환전과 해상에서도 사용하였다고 한다.

망암 선생은 함안군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마침 큰 전쟁을 겪은 후 진원과 장성의 합병으로 인한 흉흉한 민심을 순화하기 위하여 향언 20조를 만들고 시행하는 등 사회운동에 전력하다가 광해군 3년 66세로 별세하였다.

 

화차

튼튼한 나무로 제작, 쇠로 장갑을 씌었고 4면에 40개의 총구를 만들어 40발을 연이어 쏠 수 있게 하였으며, 300량을 만들어 40량은 배편으로 행주산성 권율장군에게 보내 행주대첩을 이룩하게 하였다.

 

변씨 삼강정려문

정유재란 때 후암 변윤중은 집안 종들과 장정 200여 명을 모아 왜군과 싸우다 패하고 부엉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니 그 부인과 아들 대신 며느리가 강물에 순절하여 일문에 삼강이 났으며 고종 때 삼강정려를 명하였다.
 

시징당(화차전시관)

1989년에 완공한 화차전시관이며 1986년 전라남도에서 망암문집을 참고하여 화차, 총통 등 5종을 제작하여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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