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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지정문화재

Do designated cultural property

문화재명 장성 오산창의비와 창의사
소재지 오산창의비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사거리 714 / 창의사 : 전라남도 장성군 북이면 모현리 302-1 외
지정번호 도 유형문화재 120호 (1985. 2. 25)
규 모 오산창의비:비석1기 / 창의사:건조물2동
분 류 유형문화재

상세정보

○ 오산창의비

「오산창의비」는 임진왜란 때에 장성 남문(현 북일면 오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장성현감 이귀, 전좌랑 김경수, 기효간 등 의병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순조2년(1802)에 호남의 유림들이 북이면 사거리에 건립한 것이다.

1차 남문창의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8월 24일, 김경수 선생을 맹주로 하여 일어났다. 장성현 남문에 의병청을 세우고 격문을 보내니 인근 고을에서 수많은 의병이 모여 들어, 그해 11월 김제민을 의병장으로 삼고 1,651명의 의병이 496석의 군량미를 가지고 북상하여 직산과 용인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시켰다.

그 후 고향에 돌아온 의병들은 일본과 조정의 협상을 관망하였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자 김경수 선생은 1593년 5월 29일, 다시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열어 의병과 곡식을 모집하였으며, 장성 현감 이귀는 관군 가운데 강한 군사 40명을 선발하고 읍병(邑兵) 300명을 조련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다. 이것이 바로 2차 남문창의인데, 김경수 선생의 두 아들 극후(克厚)와 극순(克純)이 의병 836명을 이끌고 동년 6월 진주성 혈전에 참전하여 진주성 함락과 함께 모두 순절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백양사 의승 70명과 1천여 명의 의병이 3차 남문창의를 일으켰다. 이들은 안성에서 큰 전과를 올렸으나 아군의 피해도 커서 화군하였다. 남문창의에 참여한 의병장 72위를 「창의사」에 모시고 매년 향화를 올리고 있다.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고 비에 새겨진 77인 가운데는 승려 9명과 노복 1명이 포함되어 있다.

 

○ 창의사

「창의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당시 장성현 남문에서 세 차례에 걸쳐 의병을 일으킨 72분 선열들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祠堂)이다.

처음에는 1794년 장성군 북이면에 창의사를 세우고 오천 김경수(鰲川 金景壽, 1543~1621) 선생을 비롯해 17분을 봉향(奉享)해 왔으나, 1868년 서원·사우 훼철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1934년 장성의 유림과 후손들은 지금의 위치에 다시 사당을 세우고 오산사(鰲山祠)라 이름하고 67분을 모셨으며, 1945년 광복 이후 두 분을 추배하여 69분을 향사해 왔다.

1981년 창의사라 이름을 고치고, 지금은 무명전사(無名戰士)까지 포함하여 72위를 매년 음력 2월 27일 봉향해 오고 있다.

장성오산 남문창의(長城鰲山 南門倡義) 특징은 첫째, 의병 참가자가 장성 한 고을을 넘어 영광·담양·나주·광주·무안·함평·고창·태인·부안·흥덕·정읍 ·무장 등 전라도 모든 지역에서 참여하였고, 둘째, 의병을 임진왜란 때 2회, 정유재란 때 1회 모두 3차례에 걸쳐 의병을 일으키고 오랫동안 활동했다.

「장성 남문창의비」라는 이름으로 1985년부터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관리되어 왔으나, 2013년에 의병에 참여한 선열들을 모신 사당까지 포함하여 확대 지정되었고 명칭도 「장성 오산창의비와 창의사」로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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