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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문화체험교육(재정비중)

조선시대 청백리

청백리의 의의와 유래?
청백리 사진
우리나라를 비롯한 유교문화권에서 깨끗한 공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로 청백(淸白)은 청렴결백하다는 말의 약칭으로 가장 이상적인 관료의 미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특별히 국가에 의해 선발되어 청백리안(淸白吏案)에 이름이 올랐던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청백리는 죽은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염근리(廉謹吏) 혹은 염리라고 불렀으며, 깨끗하고 유능한 관리를 뜻한다. 또한 청백 리는 부정부패하지 않고 깨끗한 것에 그치지 않으며 인의(仁義)가 넘쳐야 한다.

- 백성을 처자식과 같이, 나랏일을 정의롭게, 백성의 신뢰를 얻은 관료

청백리를 선발하고 표창하는 일은 고대 중국에서 시작 되었으며 한나라 문제 12년(168년)에 '염리(廉吏)'를 선발하여 표창하고 곡식과 비단으로 상을 준 것이 처음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시대부터 청백리를 표창한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 때 총 218명의 청백리가 선발 되었다. 이를 임금별로 보면 태조 5인, 태종 8인, 세종 때 황희, 맹사성 등 15인, 세조 8인, 성종 20인, 중종시절에 조원기, 송흠, 박상 등 34인, 명종 때 조사수, 이준경, 박수량 등 45인, 선조 때 박순 등 27인, 인조 13인, 숙종 22인, 경종 6인, 영조 9인, 정조 2인, 순조 4인이다. 헌종 이후 조선 말기에는 청백리를 뽑지 않았다. (전고대방) 다만 청백리를 언급하고 있는 자료가 다양한데, 221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다시 강조되는 청렴정신
최근 권력형 비리를 비롯하여 공직사회 전반에 걸쳐 부정부패가 만연함에 따라 청렴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고, 국제적인 부패감시 민간단체인 국제투명성기구(TI)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투명성 순위 및 국민권익위원회 등의 청렴도 평가 결과를 감안할 때 공직사회는 물론 국민 모두가 역사에 살아 숨쉬는 청백리 정신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할 때이다.

지지당 송흠

지지당 송흠의 생애
  • 1459년(세조 5) 장성군 삼계면 주산리 출생
  • 1480년(성종 11) 22세, 과거소과 생원시험 합격
  • 1492년(성종 23) 34세, 과거대과 문과급제, 관직 시작
  • 1502년(연산 8) 44세, 부친 별세, 낙향하여 후학양성
  • 1515년(중종 10) 57세, 여산군수
  • 1516년(중종 11) 58세, 홍문관 정자 복직
  • 1523년(중종 18)~1526년(중종 21) 65세, 전주부윤, 광주목사, 나주목사
  • 1528년(중종 23) 70세, 승정원 승지(정3품 당상관)
  • 1530년 (중종 25)~1533년(중종 28) 72세, 담양부사, 장흥부사, 전라도 관찰사
  • 1538년(중종 33) 80세, 한성부 좌윤, 이조판서, 병조판서(정2품)
  • 1541년(중종 36) 83세, 의정부 우참찬(정2품)
  • 1543년(중종 38) 85세, 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사(종 1품)
  • 1547년(명종 2) 89세, 별세
삼마태수(三馬太守) 송흠
호는 지지당(知止堂)으로 '멈출 줄을 아는 집'이다는 뜻으로 노자의 도덕경 제44장에는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따라서 오래 갈 수 있다.'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고 하였다. 멈출 줄 아는 것은 절제와 신독력으로 청렴과 검소로 가는 길이다. 송흠은 그의 호처럼 온갖 욕망을 자제하면서 살았다.
또한 선생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직만 요청하여 10여 고을의 목민관을 지냈고, 나이 77세에 전라관찰사를 사직하고, 99살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신 효자로 선생의 시호는 효헌공(孝憲公. 효의 근본, 으뜸)이다.
조선시대에는 한 고을의 수령이 부임할 때나 이임할 때는 그 고을에서 말 일곱마리를 바치는 것이 관례였으나, 송흠은 부임할 때 본인과 어머니, 그리고 아내가 탈 말 세 마리만 타고 간소하게 행차 하여 삼마태수(三馬太守)라 불리었으며, 51년간 내·외직의 관직생활을 하면서 목민관으로서 근무한 곳 마다 청렴하여 일곱 번이나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청백리 녹선

  • 1511년(중종 6)
  • 1515년(중종 10)
  • 1523년(중종 18)
  • 1527년(중종 22)
  • 1530년(중종 25)
  • 1533년(중종 28)
  • 1538년(중종 33)
수군개혁론 건의
1544년 왜구가 경상도의 사량진 포구를 습격하여 수군들이 죽고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사건이 일어났다. 한때 송흠은 병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보성군수, 장흥부사 등 포구가 있는 지역의 수장을 하기도 하여 수근 방위대책으로 중국의 당나라 선박처럼 판옥선을 제조할 것, 무기와 화포 등을 개량 할 것, 우수한 장수와 용감한 수군을 정예화 할 것을 86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종 임금에게 상소를 올린다.

- (1544. 9. 8. 중종실록) -

관수정(觀水亭)
관수정 외관사진
'물을 바라보는 정자'라는 뜻의 관수정은 1539년 병조판서 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이듬해 지은 정자로 내부에는 송흠을 비롯해 김인후, 소세양, 양팽손, 김안국, 송순, 임억령 등의 현판이 걸려져 있다.
송흠의「관수정기」中 그 물결을 보면 물에 근본이 있음을 알며, 그 맑음을 보면 마음의 사악한 점을 씻게 되니, 그런 연후에야 가히 물의 참다움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의 자손들이여 힘쓸 지어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기영정(耆英亭)
기영정 외관사진
중종 38년(1543년)에 전라도 관찰사였던 규암 송인수가 왕명을 받들어 85세의 송흠을 위하여 관수정 건너편에 지은 정자로 이 정자는 구순을 바라보는 송흠을 위한 연회장으로 나주 목사와 영광군수가 책임을 맡았고, 연회는 전라감사는 물론 인근 열 개 고을의 수령이 참석하였다. 병자호란 시 화재를 당하여 폐허가 되었다가 철종 7년(1856년) 송인수의 10대손인 송겸수가 고쳐 지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

수군개혁론 건의
여산군수로 있을 때는 고을이 큰 길 옆이어서 손님은 많은데 대접할 것이 없어, 예산을 절약하기 위해 특별한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데 이 술을 호산춘(壺山春)이라 했다. (연려실기술)

청백리란 단순하게 청렴 결백한 것 만이 아니라 예산을 절약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나아가서 백성의 삶을 살찌게 하는 것이다.

아곡 박수량

아곡 박수량의 생애
  • 1491년(성종 22) 황룡면 아곡리 하남마을 출생
  • 1502년(연산 8) 12세, 고부현감 김개에게 수학, 고부에서 망해부, 무장 백일장에서 읍취루부 지음
  • 1513년(중종 8) 23세, 과거소과 진사시험 급제 후 외직생활
  • 1514년(중종 9) 24세, 과거대과 문과급제, 승문원, 성균관, 예조, 형조, 사간원, 춘추관 등 근무
  • 1525년(중종 20) 35세, 부친 봉양위해 고부군수
  • 1527년(중종 22) 39세, 부친 별세, 시묘살이
  • 1535년(중종 30) 45세, 함경도 경차관
  • 1537년(중종 32) 47세, 춘추관 수찬관, 승정원 좌승지, 호조참판
  • 1538년(중종 33) 48세, 함경도 관찰사, 한성부윤, 호조·공조·예조참판
  • 1539년(중종 34) 49세, 5위도총부 부총관, 담양부사
  • 1542년(중종 37) 52세, 모친 별세, 시묘살이
  • 1546년(명종 1) 56세, 청백리 선정, 한성부판윤
  • 1548년(명종 3)58세, 형조·예조·공조판서
  • 1550년(명종 5) 60세, 의정부 우참찬, 좌참찬, 5위도총부 도총관
  • 1551년(명종 6) 61세, 전라도 관찰사 겸직, 청백리 선정
  • 1553년(명종 8) 63세,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 지중추부사
  • 1554년(명종 10) 64세, 별세
백비의 유래
선생이 세상을 뜨면서 '묘도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니, 명종이 크게 감동하여 서해바다 암석을 골라 하사 하시며 "박수량의 청백을 알면서 빗돌에다 새삼스럽게 그가 청백했던 생활상을 쓴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청렴을 잘못 아는 결과가 될지 모르니 비문 없이 그대로 세우라"명했다
시호는 정혜공(貞惠公)
시호는 청백수절(淸白守節)의 정(貞)자와 애민 호여(愛民好與)의 혜(惠)자가 합해진 정혜공 (貞惠公)으로 청렴결백하고 백성을 사랑한 선생의 공직생활상을 시호로도 알 수 있다. 1805년 (순조5) 시호가 내려졌다. - (조선왕조실록) -
감사원이 선정한 조선시대 3대 청백리- 황희, 맹사성, 박수량
아곡 박수량 백비
[아곡 박수량 백비]
전라남도 기념물 제193호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 소재
청백당
지금의 장관급인 한성판윤, 호조판서 등 39년 간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어머님이 살고 있는 시골집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지 않은 날이 한 달에 절반이나 되고, 집은 비가 새고 있을 정도로 청빈 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명종이 크게 탄복하여 아곡리 하남골에 99칸의 집을 지어 청백당(淸白堂)이란 이름과 함께 하사하였다. 현재는 '청백한옥'이란 이름으로 개관하여 교육생들에게 한옥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운영 되고 있다.
부패관료 엄벌
을사정난의 공신 임백령의 동생인 광주목사 임구령이 부정축재를 하였으나 임구령이 아전을 권력 으로 눌러 사실대로 아뢰는 관리가 없었다. 그러나 박수량은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 광주목사 임구령을 파직하라는 서장을 조정에 올려 직위 해제토록 하였다. 박수량은 벼슬 초기부터 권문을 추종하지 않고 청렴결백으로 자신을 지켜왔기 때문에 가능한 조치 였다.
적서차별 폐지 건의
선생이 10살인 1500년에 도적 홍길동이 잡힌다. 이에 영향을 받았는지 중종시절에 선생은 서자제도를 없애자는 상소를 올려 좋은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박수량과 홍길동은 같은 동네인 장성군 황룡면 아치실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