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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기산도, 이근택 암살 계획을 결행하다.
작성자 홍순권
내용

제18회 기산도, 이근택 암살 계획을 결행하다.

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상동교회 모임 후 상소투쟁에 나섰던 최재학 등이 구속되자, 기산도는 동지 손성원, 박용현, 김필현, 이태화 등에게 오적의 출입을 감시하게 하는 한편, 을사오적 처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기산도는 을사오적을 처단하고자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이종대 등과 결사대를 조직하고, 권총과 단도를 각자 지니고 종로에서 이근택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자살(刺殺, 칼로 찔러 죽임)하려 했으나, 경호가 심하여 실패하였다.

이후 광군(礦軍)을 모집하여 오적 행차시 돌을 던져 경호인들을 분산시킨 후에 자살을 시도할 생각으로 박경하와 용산에 가서 광군을 모집하려 했으나 또한 실패하였다. 광군 모집에 실패한 기산도는 이날 9시경 결사대 본부인 니동(泥洞) 한성모 집에서 다른 동지들과 함께 경무고문 마루야마(丸山重俊)의 부하에게 체포되었다. 박종섭, 박경하, 안한주, 이종대. 손성원 등도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들은 일본헌병대에서 갖은 고문과 매질을 당한 뒤 얼마 후 석방되었다.주1)

주 1) <김석항·기산도 등 판결선고서>에는 기산도가 광군을 모집하러 용산에 간 직후 체포된 사실은 나오나 언제 석방되었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전남일보>> 1977년 7월 6일자 <의병열전-의사 기산도>(김동영 기자)에는 기산도가 11월 19일 체포되었다가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고 했으나, 정확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기산도를 석방한 일본군은 이들을 ‘요시찰인물’로 점찍고 밤낮으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백방으로 사람을 놓아 동지를 규합한 기산도는 을사오적의 암살 기도를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은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등이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반기를 들었으나,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은 일본에 매수돼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을사늑약의 체결이 알려지자 이 늑약과 늑약 체결에 찬성한 을사오적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었다.

민영환의 자결에 이은 애국지사들의 항의 순국 소식이 줄을 이었으며,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며 을사오적을 규탄하는 유생, 관료들의 상소투쟁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들 을사오적 가운데에서도 이근택이 가장 교활하고 악독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근택은 원래 고종의 총애를 얻어 대한제국 시기 주요 요직을 거치면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이용익이 재정과 외교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이근택은 군사와 경찰부문의 책임을 맡았다. 이용익과 마찬가지로 그는 대한제국 정부의 대외관계에서 친러·반일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우세해지면서 서서히 친일적인 경향으로 돌아서기 시작하였다. 그만큼 이근택은 권모술수에 능하고 정치적 수완이 탁월하였다.

이근택도 다른 매국대신처럼 일본측에 매수되어 적극적으로 을사늑약 체결에 협조하였는데, 친러파라는 협의로 일본공사의 눈 밖에 나 있던 터라 오히려 열성적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근택은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지(長谷川好道)와는 형제의를 맺었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의탁하여 의자(義子)가 되었다고 한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었으며 일본 신발까지 신고 일본 수레에 앉아 항상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며 출입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일본이라는 보호막을 두르고 일본에 부화뇌동하여 을사늑약 체결에 앞장섰던 이근택의 매국행위에 대해서는 심지어 그의 노비조차 분노할 정도였다. 조약이 체결되던 날,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온 이근택은 집안 사람들을 불러 놓고 숨을 몰아쉬면서 궁중에서 신조약을 ‘늑약’하던 일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내 다행히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그 당시의 일화를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고 있다.

이 때 마침 비녀(婢女) 한 명이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 들고 뛰어나왔다. 이근택이 한규설의 딸을 며느리를 삼았는데, 그 며느리가 시집올 때 데리고 온 이른바 교전비(轎前婢)가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이근택! 이놈아 네놈이 대신이 되었으니, 그 나라에 입은 은혜는 어디로 갔느냐? 나라가 위태한데도 죽지 아니하고 다행히 죽음을 건졌다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 돼지 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라 하더라도 어찌 개 돼지의 종이 되겠느냐? 내 힘이 약해서 무슨 수로도 너를 죽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차라리 옛 주인에게로 돌아가겠다.”고 소리치고 한규설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처럼 민중의 분노와 지탄을 받으면서도 그는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내각에서는 한 대신에 불과하면서도 궁중에서는 수상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였다. 기산도가 을사오적 가운데 이근택을 첫 번째 응징 대상으로 삼은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기산도는 이전에 이근택의 문하에 출입한 적도 있었다고 하니 이근택의 매국행위에 대한 기산도의 분노가 어느 정도였을까는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다.

두 차례나 거리에서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기산도는 이제 방법을 바꾸어 직접 이근택의 집에 들어가 그를 암살하기로 마음먹었다. 1906년 2월 16일 마침내 동지인 이근철, 이범석과 함께 세 번째 오적암살 계획을 결행하였다. 이날 기산도 등 3인의 자객은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집을 나섰다. 이들은 각자 적들이 알아 볼 수 없도록 변장을 하고 계동(桂洞) 골목에 들어섰다. 기산도 일행이 계동 마루턱 이근택의 집에 다다른 것은 16일 밤 12시경이었다. 이에 앞서 이근택은 오후 7시 경에 별실로 퇴궐한 후 8시 경에 손님 여섯 명의 방문을 받고 이들과 대화를 나눈 후 11시 경이 되어서야 침실로 들어 모로 누었다. 그의 별실(첩)은 옆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순식간에 담을 뛰어 넘은 기산도 등 자객 세 명은 곧 바로 이근택의 침실로 들어가 한명은 이근택의 팔을 손으로 잡고 다른 한명이 칼로 이근택을 찔렀다. 이때 이근택이 황급히 방안의 촛불을 껐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자객들은 칼로 이근택의 머리와 왼쪽 어깨와 등 및 오른쪽 팔 등 10여 곳을 난자하였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마침 집안 하인 한 사람이 이근택과 그의 후실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이 때 자객 한 명이 그 하인을 칼로 공격하여 배와 얼굴, 다리 등 네 곳을 찔렀다. 이어서 안방 근처에서 경호를 하던 우리나라 병사 6명과 경위원 순검 4명이 즉시 달려왔다. 일본 헌병과 순사들도 대신의 집에 설치해 둔 설렁줄의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역시 급히 도착하였다. 그러나 기산도 일행은 이미 남쪽의 벽돌담에 설치해 놓은 밧줄을 타고 도망한 뒤였다.

기산도의 이근택 자격(刺擊) 사건은 조정을 경악케 하였다. 참정대신 박제순과 내부대신 이지용은 다음 날 일찍 고종 황제를 알현하고 사건전말을 보고하고 치안책임자에 대한 엄중한 문책을 주청하였다.

간밤에 군부대신 이근택의 집에 자객이 뛰어들어 해당 대신의 몸에 부상을 입혔다고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평소에 경찰이 엄격하고 명백하게 일을 처리했다면 어떻게 이런 변이 일어났겠습니까. 경무사를 엄중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해당 청에서 특별히 염탐하여 기한을 정해놓고 범인을 체포하도록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편 이 사건은 곧바로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대한매일신보>>에서는 <李氏逢刺(이씨봉자)>란 제목하에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군부대신 이근택씨가 재작일 하오 12시경 그의 별실과 함께 막 옷을 벗고 취침하려 할 즘에 갑자기 양복을 입은 신원을 알 수 없는 3인이 칼을 들고 돌입하여 가슴과 등 여러 곳을 난자하여 중상을 입고 바닥에 혼절한 바, 그의 집 청지기 김가가 내실에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괴이히 여겨 탐문하고자 하니 갑자기 양복 입은 3명이 안에서 급히 나와 놀라 누구냐 하고 물은 즉 이들이 역시 칼로 김가를 타격하여 귀와 어깨에 부상을 입히고 곧바로 도망갔다. 이군대(李軍大, 이근택 군부대신)는 한성병원에서 치료중이나 부상이 극중(極重)하여 위험이 팔구분(八九分, 십중팔구)이라더라.

이근택은 중상을 입고, 붉은 피를 침구 및 방안 사방 곳곳에 줄줄 흘렸다. 새벽 2시경 한성병원 특별실로 들것에 실려가 치료를 받았다. 치료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으며 집안 하인 또한 그의 집에서 치료를 받아 상처가 나았다.

이근택을 처단하기 위해 실행에 옮긴 사람은 기산도와 이근철, 그리고 이범석이었다. 기산도는 사건 직후 곧바로 체포되었다.주2) 기산도는 얼굴이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인조수염으로 위장했으나, 결행 과정에서 인조수염 하나가 대청에 떨어졌고, 그것이 단서가 되어 체포되었다. 이근철이 인조수염을 구입하였는데, 결국 상점 주인의 증언에 따라 이근철과 기산도의 꼬리가 잡히고 만 것이었다.

주2) <<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22일자 잡보 <怪疑消息>.

기산도와 함께 거사에 참여한 이범석은 전덕원, 현학표, 이식, 이상린 등과 함께 김석항이 조직한 유약소에도 가담하여 정부에 상소도 하고 각국 공사관에 장서를 보내는 투쟁을 하다가 체포되어 일본군 사령부에 구금되기도 했던 인물이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기산도의 거사는 유학자 김석항이 주도한 유약소의 인물들과도 연결된다. 정교의 <<대한계년사>>에서는 기산도가 전 경무사 구완희와 전 경무관 이세진과 함께 자객을 모집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달아나서 체포를 모면하였다고 하였다. 또 이근철은 체포 당시 구완희의 사주를 받았다고 진술하였다.

기산도의 이근택 암살 기도 사건은 당시 을사오적 등 ‘매국노’들에게 충격을 준 큰 사건이었다. 이 사건 이후 을사오적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으며, 혹시 있을 암살을 모면하기 위해서 경호를 더욱 더 강화하였다. 박제순, 이지용 등 오적대신의 집에는 병사들이 총을 메고 경계하며 지켰는데, 종전보다 갑절이나 더욱 몹시 엄중하게 지켰으며 오고가는 손님들로부터 명함을 받고 샅샅이 살폈다.

기산도는 재판에서 1906년 5월 13일 2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참고문헌

김석항·기산도 외 판결선고서(1906. 5. 13.)
황현, <<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편, 1971)
정교, <<대한계년사>> (소명출판 편역, 2004)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8권, 국가보훈처, 1990.
김상기, <기산도의 항일의열투쟁>, <<백범과 민족운동 연구>> 제4집, 2006.
기타 <<황성신문>> 및 <<대한매일신보>> 등의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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